컴퓨터 네이버 창을 열어 메일을 확인하려고 했다. 어라? 자동 로그인이 되어있어야 할 텐데, 로그아웃 상태였다.
‘내가 로그아웃을 했었나?’ 잠깐의 의심 후, 로그인을 위해 아이디와 비번을 입력했다.
‘어? 왜 자꾸 비번이 틀리다고 나오는 거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손바닥에 땀이 고이기 시작하고, 노트북 자판을 치는 내 손이 황급하다. 결국 몇 번의 로그인 실패로 2차 인증을 하라는 문구가 떴다.
결국 새로운 비번을 설정하고 메일함을 들어갔다. 메일함에는 몇십 개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는데, 일반적인 광고 메일이 아니었다.
***카페에서 탈퇴되었습니다
***카페에서 활동이 정지되었습니다.
***카페에서 탈퇴되었습니다.
무수하게 많은 카페에서 탈퇴되어 있었다. 그리고, 쪽지함을 열어보았다.
“이런 글을 올리고 싶냐?”
비아냥거리는 메시지였다. 그때야 알게 되었다. 내 네이버 아이디로 수많은 카페에서 이상한 것, 그러니까 ‘쌔끈한-’으로 시작되는 불법 광고를 올린 것이었다. 고작 한두 시간 사이에.
네이버 아이디 해킹을 검색하고, 비밀번호를 바꾸고, 2차 인증을 설정했다. 로그인 기록을 보니, 전라남도 어디에선가 접속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스팸메일함을 열어보았더니, 역시나 해킹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한 두세 시간가량 동안 차단한 지역에서 로그인이 시작되고, 로그인을 알아챌까 봐 알림 없이 로그인하는 기기로 등록까지 한 것이었다.
아찔했다.
급하게 설정을 바꾸고 있을 즈음 퇴근시간이 되어 있었고, 아들로부터 문자가 한 통 왔다.
‘엄마, 다리가 옆으로 꺾여서 안 움직여. 발목이 아파.’
내게 닥친 두 번째 소식이었다.
아들이 학교에서 배구를 하다가 발목을 다친 것이었다.
서둘러 가방을 싸고 아들의 학교로 달려갔다. 다친 아들에 대한 걱정과 해킹을 당한 당황스러움 때문에 누군가 내 뇌 속에 들어와 마구 헤집어놓은 듯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바로 ‘낭패’였다.
생각이라는 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그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내 머릿속에 ‘낭패’라는 한자어가 떠올랐다.
‘맞아, 이거 신화 속 동물이었는데? 오늘은 이걸 써볼까?'
그 상황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참…
그래서 오늘은 사자성어는 아니지만, ‘낭패’라는 한자어에 대해 설명해볼까 한다.
‘낭패’는 ‘이리 낭(狼)’과 ‘이리 패(狽)’로 이루어진 한자어로, 온갖 괴물이 등장한다는 중국의 고전인 <산해경>에 등장하는 동물 중 ‘낭’과 ‘패’라는 동물을 합한 단어이다.
그림이 나와있지 않아 아쉽지만, 사전의 해설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낭(狼)과 패(狽)는 모두 이리의 일종(一種)으로서 낭(狼)은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으며, 패(狽)는 그와 반대(反對)이다. 그 두 짐승이 같이 나란히 걷다가 서로 사이가 벌어지면 균형(均衡)을 잃고 넘어지게 되므로 당황(唐慌ㆍ唐惶)하게 되는 데서 유래(由來)한 말.
상상해 보자.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은 짐승과 뒷다리가 길고 앞다리가 짧은 짐승이 마치 2인 3각 경주하듯 나란히 걸어간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했을 내 상황과도 어찌나 찰떡같이 어울릴 수가 있는지.
생각난 김에 산해경의 동물 명칭에서 유래한 ‘교활’이라는 단어를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한다.
교활은 '간사할 교(狡)'와 '간사할 활(猾)'자가 합한 글자인데, 마찬가지로 <산해경>에 등장하는 교와 활이라는 동물의 이름이라고 한다.
교활은 나무위키의 내용을 먼저 인용한다.
원래 교(狡)와 활(猾)이라는 상상의 동물에서 유래한 말로, 호랑이를 만나면 몸을 공같이 만들어 호랑이 뱃속으로 들어간 뒤 그 내장을 뜯어먹어 호랑이를 죽게 만든 후에 뱃속에서 나온다는 데서 유래했다. 특이한 것은, 교는 길조인 동물인 데 반해 활은 흉조를 상징한다고 하며, 또한 교가 있는 곳엔 항상 활도 따라다닌다고 한다. 일상에서 길흉이 항상 동반해 반복되는 것을 비유한 말일 수도 있다.
추가 설명을 덧붙이자면 ‘교’는 개의 형상에 소뿔을 달고 표범 무늬가 있는 동물로, 이 놈이 나타나면 풍년이 든다고 하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활’은 사람 생김새에 돼지 털로 덮여 있는데, 한번 깨어나면 도끼로 나무를 찍는 듯 큰 소리를 내어 세상이 혼란에 빠진다고 한다. 두 마리 모두 호랑이 뱃속에 들어가 호랑이를 죽게 만든 후에 유유히 걸어나오는 모습이 딱 교활한 것 같지 않을까?
이렇게 ‘교’와 ‘활’ 모두 간악한 동물이라고 하여 ‘교활’이라는 단어가 ‘간사하고 꾀가 많다’는 뜻이 된 것 같다.
어쨌든 오늘은 정말 낭패에 낭패를 거듭한 날이었던 것 같다.
아들은 결국 깁스를 했고, 나는 네이버 비번을 바꾸고 보안을 강화했지만, 탈퇴된 카페에는 다시 가입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카페에서 주로 정보를 얻는 편인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리고 물론 아무도 그 닉네임의 주인이 나라는 걸 모르겠지만,나라는 존재의 온라인 명예(?)를 더럽혀놓은 그 해킹범은 정말 용서가 안 될 것 같다.
狼狽(이리 낭, 이리 패) :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기대에 어긋나 매우 딱하게 됨
狡猾(간사할 교, 간사할 활) : 간사하고 꾀가 많음
* 배경 그림은 챗지피티로 '낭'과 '패'가 나란히 걷는 형상을 표현해보고 싶었지만, 챗지피티도 이런 기괴한 형상의 동물은 만들 수 없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