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에 대한 사랑을 내 욕심과 동일시하지 않도록
아침부터 늦잠을 자는 둘째 아이가 마땅찮았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데도, 여전히 느긋한 모습에 화가 난 까닭이었다. 그 바람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었다. 방으로 돌아와선 미안한 마음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둘째 아이는 갑작스레 발병한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퇴를 선택했다. 그 당시는 입시가 뭐가 중요하냐며, 건강만 되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지금 내 입에서는 공부하라는 소리부터 나오고 있었으니...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에 책장을 뒤적이다 펼친 <논어>에서 아래와 같은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子는 釣而不綱하시며 弋不射宿이러시다.
(낚시 조, 어조사 이, 아니 불, 그물 강, 주살 익, 아니 불, 쏠 사, 잘 숙)
‘孔子께서는 낚시질은 하시되 그물질은 하지 않으시며, 주살질은 하시되 잠자는 새를 쏘아 잡지는 않으셨다.’
<논어 술이편 26장>
윗 문장에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조이불강’이다. ‘낚시질은 해도 그물질을 하지는 않는다’는 ‘조이불강’은 ‘무슨 일에나 정도를 넘지 않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곧 무엇이든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취하는 것은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조이불강'하고 있는가?
인생의 중반을 넘어가는 어른이 된 나는, 대개 하고자 하는 욕망과 현실 사이의 타협점을 적절히 잘 조절하며 살고 있다. 물론 자발적으로 욕심을 내려놓았다기보다는 실현 가능성이 있는 범주 안에서 내가 꿈꿀 수 있는 것들만을 꿈꾸는(글과 관련된 것들이 내 욕망의 대부분이지만…) 까닭에, 터무니없는 과도한 욕망으로 나 자신을 해칠 정도의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좋게 말하면 현실적인 어른이 되었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주제 파악을 잘하는 것이랄까?
그런데 정작 내게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식에 대한 사랑이 클수록 욕심 또한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자식에 대한 기대를 나의 욕망과 동일시하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이다.
예전에 어떤 일을 계기로 학부모 집단 상담에 같은 학부모의 자격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 아버지가 제 아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자신의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아이는 걸핏하면 무단으로 결석을 일삼았고, 설령 등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종일 엎드려 자는 게 일상인 아이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에게 자신이 요구하는 것이라고는 아침 6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보통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것뿐인데,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않으니 계속 갈등이 생긴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었던 아들은, 새벽에 일어나는 대신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는 것을 택했고, 아버지가 출근하고 난 이후부터 종일 잠을 자며 밤낮이 뒤바뀐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 아이의 아버지를 보며, 함께 있던 우리 중 누군가가 말했다.
“저라도 그렇겐 못 하겠는데요?”
그렇다. 그것은 아이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아버지의 일방적인 욕심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도 하는 말 같았다. 내가 바라는 것이 새벽 6시에 일어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니겠지만, 자식을 향해 또 다른 종류의 촘촘한 그물을 던져 옭아매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했다.
실제로 나는 아이에게 이 정도는 기본이 아니냐며 강요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내가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아이에게는 숨 막히는 삶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반성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조차도, 여전히 아이를 나와 별개의 한 인간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다만 나의 욕심을 자식에게 투영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쓸 뿐이다.
왜냐하면 부모라고 해서 촘촘한 그물질로 아이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놓아줄 자신도 없지만.
다만, 구멍 숭숭한 넉넉한 그물질로 안전한 울타리만을 제공하며, 아이의 삶을 오롯이 자신의 몫으로 감당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가, 부모인 우리에게는 있다.
釣而不綱(낚시 조, 어조사 이, 아니 불, 그물 강): 낚시질은 해도 그물질을 하지는 않는다. 무슨 일에나 정도를 넘지 않는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