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이면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하는데, 2020년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라는 재미있는 사자성어를 선정했다. '아시타비'는 '나는 옳고 타인은 틀렸다'는 뜻을 가진 출처가 없는 신조어이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내로남불’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뉴스를 틀면 여야 할 것 없이 저마다 자신이 옳다며 싸워대는 얘기만 나오니 아마도 ‘내로남불’을 대체할만한 사자성어를 만든 게 아닐까 유추된다.
‘나는 옳고 타인은 틀리다.’는 ‘아시타비’의 등장은 우리가 얼마나 편협한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결코 남이 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조금 부끄러운 기억을 떠올려볼까 한다. 혈기왕성하고 분기탱천했던, 지금보다 조금 젊은 교사였을 때였다. 의욕도, 열정도, 신념도 활화산처럼 펄펄 끓어올라 주체가 안될 때였다.
그 당시 나는 내가 가르치는 과목인 한문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명제에 빠져있었다. 한문이라는 과목을 아이들이 좋아하게 하고 싶었으니까.
스킬은 부족하고 의욕만 넘치는 교사가 재미있는 수업을 하겠다고 달려드니 수업시간이 얼마나 소란스러웠을까? 지금은 활동 중심으로 운영되는 수업이 많은 까닭에 수업시간이 그다지 조용하진 않지만, 그 당시엔 대개의 수업이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얌전히 앉아서 수업을 듣고, 선생님 혼자서 강의식 수업을 하는 게 모범 수업의 표본처럼 여겨지는 시대였으니까.
시끌벅적 소란한 수업을 하는 교사, 교직원 회의에서 꼭 손을 들어 질문하는 교사, 복장 지도를 하라고 했더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되묻는 교사, 그게 딱 나였다.
이런 정황들을 모두 따져보면 나는 모난 돌 그 자체였고, 난 내가 옳은 줄만 알았다.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내가 공개수업을 해야 할 차례였는데, 일반적으로 동료 교사가 수업을 참관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갑자기 교장선생님께서 우리 반 학부모들을 초대해서 공개수업을 하는 것으로 바꾼 것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한 학급의 학부모만 초대해서 수업을 한 사례가 없었기에, 당연하게도 나는 부당하게 수업을 공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학급 아이들이나 학부모와 너무 잘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내 편처럼 여겨졌다. 반면 부당한 수업공개를 시킨 교장선생님에게만큼은 어떤 식으로든 되갚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제대로 ‘먹이고’ 싶었다. 아니 ‘멕이고’ 싶었다가 더 찰떡같은 표현에 가까우려나?
어쨌든 나는 한문 수업시간에 한자 파자를 활용한 퀴즈 형식의 게임 수업을 계획했고, 대망의 마지막 문제를 준비했다.
아래는 조선 후기의 방랑 시인인 김삿갓이 어느 시골의 서당을 방문했다가 천대를 당한 뒤 서당 훈장을 향해 조롱의 뜻을 담아 지어 준 것이라고 알려진 시인데, 시 가운데 숨겨진 두 글자를 찾는 문제였다.
天脫冠而得一點 (하늘 천, 벗을 탈, 갓 관, 그리고 이, 얻을 득, 한 일, 점 점)
天이 관을 벗고 점을 하나 얻는다
(天에서 선을 빼고 점을 찍으면 犬이 된다.)
乃失杖而橫一帶 (이에 내, 잃을 실, 지팡이 장, 그리고 이, 가로 횡, 한 일, 띠 대)
乃가 지팡이를 잃어버리고 하나의 띠를 가로지른다.
(지팡이에 해당하는 선을 빼고, 가로 선을 그어주면 子가 된다)
시의 정답은 바로 ‘犬子(견자)’였다. 교장선생님과 학부모가 있는 공개수업 자리에서 ‘개아들’을 시전 했으니…….
퀴즈를 풀면서 분위기는 고조되다 못해 과열(솔직히 너무 시끄러웠다)되었고, 다행히 아이들과 학부모 모두 웃으며 수업이 끝났다. 단 한 명만 빼고.
은갈치색 정장을 세련되게 차려입은 교장선생님은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표정을 잔뜩 구기며, 학부모님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내게 면박을 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란스러운 게 어떻게 수업이 될 수 있느냐고 교사로서의 자질 운운하면서 말이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살벌해졌고, 나와 교장선생님 사이에서 학부모님들이 눈치를 보기에 이르렀다.
학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는 교장실로 곧장 내려갔다. 아마 그때의 내 모습은 성난 황소나 다름없지 않았을까? 나는 교장선생님을 향해 쏘아붙였다. 학부모가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내 체면은 뭐가 되냐고 말이다. (그때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엄청 버릇없지 않았을까?)
그때는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만 생각했고, 단 한 번도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때를 돌이켜 봤을 때 과연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한 나머지, 나의 잘못을 돌아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도 결국은 교장선생님을 곤란하게 하겠다는, 명백히 의도된 수업을 한 것이니까.
아무리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수업을 해야 했을까? 좀 더 유연하게 내 의사를 표현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당시의 교장선생님에게는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교사의 상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나를 바로잡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선배 교사이자, 한 학교를 이끌어가는 관리자로서의 책임감으로, 그가 생각하는 옳음을 내게 가르쳐주기 위해.
우리는 독립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사회 속에서 제가 맡은 역할과 직위에 따라 가치의 기준도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어떤 식으로든지 남들과 충돌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남들과 충돌하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전제는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가진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오만을 버리는 것,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 그렇게 수용하고 타협하며 적정한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
아시타비의 본능을 버리고 역지사지의 노력을 해보는 것이야말로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