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묵자흑’은 중국 서진(西晉)의 학자인 부현(傅玄)이 편찬한 '태자소부잠 (太子少傅箴)’에 나오는 글귀의 일부분이다.
近朱者赤 近墨者黑 聲和則響淸 形正則影直
(가까울 근, 붉을 주, 사람 자, 붉을 적, 가까울 근, 먹 묵, 사람 자, 검을 흑, 소리 성, 고를 화, 곧 즉, 울릴 향, 맑을 청, 형상 형, 바를 정, 곧 즉, 그림자 영, 곧을 직)
주사(붉은 색 광물)를 가까이한 자는 붉어지고, 먹을 가까이한 자는 검어진다. 소리가 고르면 울림이 맑고 형상이 바르면 그림자도 곧다.
내가 초임 시절 일이다. 중학교 일 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우리 반에 각기 다른 이유로 돋보이는 두 남학생이 있었다.
한 명은 정도 많고 웃음도 많은, 인간적 매력이 흘러넘치는 우리 반 반장이었다. 담임인 내가 심각한 표정만 지어도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먼저 물어볼 정도로 마음이 따뜻한 친구였고, 수업시간에는 늘 선생님과 눈을 맞추며 공부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심지어 귀엽게 생긴 외모에 애교도 많고 춤까지 잘 췄으니, 예뻐하지 않기가 더 힘들 정도였다.
또 한 명은 입학식 전 예비소집일 날부터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아직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아이들 틈에서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올라온 큰 키, 위아래 검은 트레이닝복에 삼선 슬리퍼, 그리고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를 한 채 한쪽 발을 책상 밖으로 쭉 뻗고서 발끝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풍기는 분위기와 외모까지 도저히 중학교 일 학년이라고 볼 수 없는 친구였다.
반장은 특유의 활달한 성격 탓에 학급 아이들 누구와도 잘 어울렸는데, 역시나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그 친구가 제일 문제였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생각조차 없는 것인지,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외딴섬처럼 혼자 앉아있는 통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고, 다른 아이들은 그 아이와 짝을 하는 것을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장 아이가 내게 찾아와서 말했다. 그 친구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걱정이 된다고, 자기가 그 친구와 짝을 해서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나서보겠다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자진해서 내게 그런 말을 했으니, 얼마나 고맙고 기특했는지.... 그렇게 두 아이는 짝꿍이 되었고, 역시나 가까워졌다.
반장 아이 덕분에 그 친구도 조금씩 다른 아이들과 허물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앞장서서 체육대회 준비를 하거나, 학급 단합대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나는 두 아이를 보면서, 결국 선함이 주변을 물들인 것에 뿌듯해하며 행복한 일 년을 보냈다.
그리고 두 친구가 2학년에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자주 볼 기회가 없었다. 내가 있던 학교는 규모가 큰 학교였기 때문에 간혹 복도를 지나치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다.
2년이 지난 후, 졸업을 앞둔 3학년 아이들 가운데 졸업식에 상을 줄 만한 친구들을 뽑기 위한 시상 추천 건으로 선생님들과 회의를 할 때였다.
내가 예뻐해마지않던 반장은 중학교 3학년 전교 부회장이 되어 있었는데, 그 아이에게 공로상을 주는 것에 대해 선생님들이 열띤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그 자리에서 반장 아이가 그간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게 되어 버린 것이다.
반장 아이는 공부는커녕 담배를 피우고, 불량한 아이들과 무리 지어 다니며 일탈행동을 일삼았다. 그리고 불량한 아이들의 한가운데 그 친구가 있었다. 반장 아이가 스스로 나서서 짝이 되어주겠다고 했던.
반장 아이에게 공로상을 주기로 했는지 아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알던 모습과 전혀 달라진 모습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으니까.
반장 아이가 그 친구와 함께 어울리지 않았더라면, 짝이 되겠다고 했을 때 내가 거절했더라면 이처럼 많이 변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온갖 가정과 후회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물론 그 친구가 아이들이 흔히 겪는 사춘기의 방황을 겪고 있는 중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담임이었던 나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반장 아이가 자기와 닮은 착한 성품을 가진 친구들을 사귀었다면 그렇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랫동안 괴로웠다.
흰색은 오염되기 쉽고, 검은색은 주변을 물들이기 쉽다. 일탈은 유혹적이고 바름은 지루하다. 그래서 일탈을 하기는 쉽지만 바르게 살기란 어렵다.
검은색을 덮고도 남을 만큼의 고결한 깨끗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물들지 않기 위해 사람을 가려 사귈 필요가 있는 것이고, 그러니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인격을 대변해 주는 척도일 수밖에 없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어느 날, 반장아이가 아닌 범상치 않은 포스를 풍겼던 그 아이를 국기원 앞에서 우연히 만났다. 운동을 좋아했던 그 친구는 태권도 사범이 되어 있었다. 태권도 승급 심사를 위해 초등학생 아이들을 인솔해 온 것이었다. 독기가 쏙 빠진 다정한 표정으로 어린아이들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살뜰히 챙기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아이의 인생에 지독하게 검은 사람들만 만났다면 저렇게 늠름하고 훌륭한 어른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본받을 만한 친구가 있었을 테고, 수용해 주고 이해해 주는 어른을 만났을 것이다.
자칫하면 지독하게 검어질 뻔했던 그 아이의 인생은, 조금씩 흰 물이 섞이어 비로소 제대로 바른 색을 내는 올바른 어른으로 자라게 된 것이리라고.
그리고 꼭 한 번은 만나보고 싶다. 비록 방황을 하긴 했지만, 지금 이렇게 훌륭한 어른으로 살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그 반장 아이를.
近墨者黑(가까울 근, 먹 묵, 사람 자, 검을 흑) :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