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라는 선물
중국 변방에 말을 키우는 노인이 있었다. 어느 날 그가 키우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 버렸다. 말을 찾으러 오랑캐 땅으로 갈 수 없는 노릇에 낙심하고 있던 차에 달아난 말이 준마를 한 필 끌고 왔다. 덕분에 말 한 필이 더 생겨 기뻐하고 있던 와중에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만다. 아들이 다쳐 슬퍼하고 있는데, 오랑캐와의 전쟁에 변방 젊은이들이 모두 전쟁에 끌려가게 된다.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다친 까닭에 전쟁에 나가지 않게 되어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 새옹지마인데, 인간의 삶이라는 게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이순간 어떤 이는 더이상 바닥이 없을 만큼의 슬픔과 고통의 과정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누구에게나 쉬운 길로만 안내하지 않으니까. 지금 내가 안온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 앞에 커다란 폭풍우가 닥칠 지도 모르고, 자신에게 닥친 어떤 고통과 불행의 열매가 또다른 행복의 작은 씨앗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투병이 내게 소설이라는 또 하나의 기쁨을 가져다 주었듯이.
내게 느닷없이 찾아온 만성신부전증이라는 병은 감당할 수 없을만큼 큰 불행임이 분명했다. 그 당시 나는 내게 닥친 불행 앞에서 정말 어찌해야할 바를 몰랐다. 당장 죽을 병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칠 수 있는 병도 아니었다. 망가진 몸을 이끌고 죽을때까지 방전되지 않게 조심조심 버티며 살아야 하는 병이라고 할까? 몸은 극도의 피로감으로 모래 주머니를 매단 듯 무거웠고, 걸핏하면 숨이 차고 구역질이 났으며, 다리가 퉁퉁 부었다.
억울했다. 아니 분통이 터졌다. 고작 이렇게 살기 위해 태어난 걸까? 그러면 내 인생이 너무 볼품없는거 아닌가? 이렇게 보잘것 없이 살다가 죽고 싶진 않았다. 나라는 존재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를 어디에서든 찾고 싶었다. 그래서 무엇인가 끄적이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것은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많은 체력을 소모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이른바 가성비 최고의 행위였으니까.
난 어릴 적부터 상상하는 걸 좋아했다. 상상 속에서 세계를 창조하고 주인공을 만들어 이리저리 굴리는 맛이 있다고 할까? 그래서 겁도 없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이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시기였으니, 글을 쓴다는 것이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인지 판단조차 하지 않은 채였다.
쓰기만 하면 멋진 작품이 나올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낙관을 하며, 투병을 극복하고 세기의 명작을 남기는 소설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무모한 도전이었다. 소설을 쓴다는 게 그만큼 쉽게 도전할 일은 아니니까. 심지어 내겐 천부적인 재능 같은 것도 없었다.
그래도 썼다. 이것마저 포기하면 난 진짜 별 볼일 없는 병자일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쓰기를 반복하다보니 쓰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났다. 소설 속 세계에서 내가 가진 병은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그렇게 소설은 투병과 함께 찾아왔다. 이제 내게 소설은 영원히 함께 할 친구이며, 인생의 달콤한 과육이고, 누구도 뺏어갈 수 없는 내 보물이 되었다. 물론 앞으로도 내가 세기의 명작을 남길 가능성은 없어보이지만 말이다.
만약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안달이 나지 않았다면, 감히 소설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을까? 수십번 그때로 되감기를 해봐도 아니라는 대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변방의 늙은이에게 도망 간 말이 준마를 데리고 나타나듯, 지긋지긋하기만 했던 병이라는 놈은 내게 소설이라는 최고의 벗을 선사한 것이다.
지금 무저갱을 헤매는 것처럼 힘든 여정을 지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일단 살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끝없이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은 삶이라도, 밑바닥 어디에선가 뜻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건져올릴 수도 있으니까.
塞翁之馬 (변방 새, 늙은이 옹, 어조사 지, 말 마) : 변방 늙은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