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가 이끄는 초나라 군대가 사면이 한나라에 둘러싸여 포위된 상태였다. 군량미도 얼마 남지 않고, 병사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도 항우의 군대가 끝까지 버티고 있자, 한나라의 장수인 한신이 꾀를 낸다. 한나라에 이미 항복한 초나라 병사들로 하여금 한밤 중에 초나라의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었다. 사방에서 들리는 초나라의 노래는 포위되어 있던 초나라 병사들로 하여금 전쟁의 의지를 꺾기에 충분했다. 한나라 영지에서 들리는 고향의 노래에 이미 많은 초나라 사람들이 항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패배감에 젖어든 것이다. 결국 그 전투에서 초나라는 패배하고 항우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사면초가는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외롭고 곤란한 처지에 빠져있을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앞서 장기 이식 얘기가 나온 김에 신장 투석을 받던 시절의 추억을 떠올려볼까 한다. 그 시절이 내게는 딱사면초가라고표현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쌍둥이를 낳은 지 딱 일 년째 되던 해에 만성신부전증 진단을 받았다. 그때 나는 몸이 심각하게 좋지 않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단지 자고 일어나도 피곤함이 가시지 않고, 아침에 눈을 뜨면 몸이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뿐이었다.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엄마가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 단순히 아이를 낳고 몸이 회복하지 못한 것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건강검진센터에서 요단백과 크레아틴 수치가 높다며 신장내과 예약을 잡아줄 때까지만 해도 ‘요즘 무리를 하긴 했지’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의 검사와 신장 생검까지 이어지며 만성신부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신의 신장은 천천히 나빠지고 있으며, 언젠가 투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아지지는 못할 망정 점점 나빠질 거라는 무책임한 말이 또 있을까? 더 나빠지지 않게 발버둥 쳤지만 의사의 말은 결국 실현되었고, 십 년이 채 지나지 않아 투석을 받게 되었다.
신장 투석에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혈액투석과 복막투석이 있다. 대게의 사람들은 혈액투석을 하게 마련인데, 텔레비전 드라마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나는 복막투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혈액투석은 이틀이나 하루에 한 번 병원에 가서 2시간가량 투석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들을, 그것도 쌍둥이를 키우는 내게 그 두 시간은 어마어마한 육아의 공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굳이 병원을 가지 않아도 집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복막투석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복막투석은 복막에 구멍을 뚫어 관을 연결하고 투석액을 주입하는 것인데, 복막이 필터 역할을 하여 혈액 내의 노폐물이 복강으로 모이고, 모인 수분과 노폐물은 다시 복강 밖으로 배출하는 과정이다. 복막투석은 병원에 갈 필요 없이 집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물론 복막을 뚫었기 때문에 위생에 신경 쓰지 않으면 복막염에 걸릴 수 있지만, 저울 위에 안전과 시간을 올려놓는다면 내게는 아이들에게 쓸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에 복막투석은 당연한 선택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어김없이 밤 10시가 되면 마치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듯, 자동복막투석기계에 복막투석 도관을 연결한다. 그러면 기계가 밤사이 복막을 자동으로 걸러주는 역할을 한다. 그 과정이 힘들거나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고통도 반복하면 익숙해지듯 천천히 적응해 갔다. 하지만 정작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아픈 엄마인 까닭에 내 아이를 온전히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었다.
둘째는 어릴 때부터 크고 작은 질병을 자주 앓았는데, 그날은 심한 장염으로 밤새 고열과 구토를 반복하고 있었다. 밤이면 도관을 연결해야 하기 때문에 친정엄마가 아이들을 돌봐야 했지만, 그날따라 유달리 내게 더 매달리는 아이를 떼놓을 수 없었다.
매번 아픈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방으로 들어가 투석을 해야 하는 내가 자식에게 너무 매몰찬 엄마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픈 아이의 곁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거실에 커다란 이불을 펴놓고 자동복막투석기계를 거실로 옮겼다. 그리고 배에 관을 연결하고 투석기계를 작동시켰다. 자동투석기에 몸을 연결한 채 아이 옆에 누워 간호를 하기 시작했다. 여느 엄마들처럼 물수건으로 뜨거워진 몸을 닦아주고 해열제를 먹이며 밤을 보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의 칭얼거림에 눈을 떴을 때였다. 아이와 내가 누워있는 이불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아이가 실수라도 한 것인가 싶어 이불을 걷어냈다. 알고 보니 기계가 오작동한 것인지, 내가 잘못 조작한 것인지, 기계에 연결된 2리터가 넘는 투석액이 모두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아프며 보채는 아이와 축축하게 젖은 이불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며 나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결국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친정엄마는 축축해진 바닥을 닦고, 젖은 이불을 걷어내며 밤을 새우다시피 하셨다.
기억이라는 게 때로는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3미터 정도 길이의 도관에 연결된 채 고생하는 친정엄마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내 감정과, 아픈 아이의 표정과, 퀭한 눈으로 수습을 하고 있던 친정엄마의 모습이 지금 당장이라도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떠오른다.
엄마인 내가 아프다는 건 내가 사랑하는 아이를 마음껏 돌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 내 소망은 평범한 여느 엄마들처럼 아픈 아이를 안고 밤새 간호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픈 아이를 간호하지도, 내 몸조차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내 신세가 그때만큼 비참하고 서글펐던 적이 있을까?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코너에 몰려 망연자실하게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시절이 아마도 내겐 사면초가이지 않았을까?
다행히도 나는 초나라의 항우처럼 끝내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기적을 얻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절대 나의 노력도, 나의 운도 아닌, 어떤 이들의 선의, 그것이었다. 뇌사자 장기기증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희망이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은 절망의 한가운데에 내려진 빛이나 다름없었다.
뇌사자 장기기증이 내겐 기적 같은 선물이지만, 고인의 가족의 입장에서는 힘겨운 결정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족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조차 감당하기 힘들 텐데, 고인의 신체를 훼손한다는 것이 몹쓸 짓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을 테니까. 나라도 내 가족의 죽음 앞에서 망설임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쥐어뜯는 것만 같이 아픈데, 그게 어떻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일 수 있을까?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일한 희망인 장기기증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장기 기증을 받고 기적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렇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다. 그 마음을 표현할 기회가 없었을 뿐, 숨을 쉬는 매 순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