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나영 Oct 01. 2024

결초보은, 결코 잊지 않는 것

뇌사자 장기이식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질 만큼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은혜의 크기가 얼마나 되어야 은혜라고 여길 수 있을까?

인간이란 혼자 살 수 없기에 늘 누군가 함께 한다. 그렇기에 은혜라는 거창한 단어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남들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생활한다. 화장실에 갔는데 휴지가 없어서 곤란해하고 있는데 누군가 슬그머니 휴지를 내미는 그런 일들은 누구나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이런 도움을 받았을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도 두 가지로 나뉠 것이다.

‘앗싸, 오늘 운이 좋구나.’라고 여기거나, ‘참 고맙다.’라고 말이다.

 아마도 이것을 자신의 운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 모든 게 제 복일 것이다. 반면 감사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보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그 생각은 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자연스레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은혜란 것은 내가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달린 게 아닐까?


 은혜를 잊지 못하고 갚는다는 뜻을 가진 '결초보은'은 중국 춘추좌씨전에 나 위과라는 장수의 이야기에서 유래다.

 춘추시대 진(晉) 나라의 대부인 위무라는 사람에게 젊은 첩이 있었는데, 자신이 죽으면 자신을 따라 첩을 순장시켜야 하는 것을 늘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평소에 제 아들 위과에게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의 첩을 순장시키지 말고 개가시켜주라는 유언을 하곤 했다. 그런데 죽기 직전 위무는 마음을 바꾸어 위과에게 제 첩을 순장시키라는 유언을 남긴다. 고민에 빠진 위과는 결국 평소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아버지의 첩, 곧 제 서모를 개가시켜 주었다. 후에 진(晉)나라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상대국의 적장이 너무 강했던 까닭에 진(晉)나라의 장군인 위과는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적진에서 달려오던 적장의 말이 갑자기 풀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위과는 이 기회를 틈타 적장의 목을 베고, 전쟁은 위과가 이끄는 진(晉)나라의 승리로 끝이 난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는데, 그는 바로 제 서모의 죽은 친정아버지였다. 그는 제 딸이 죽지 않을 수 있게 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해 전쟁터에 나타나 풀을 묶음으로써 적장의 말이 걸려 넘어지게 했노라고 말을 한 것이다.


  귀신이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가 버젓이 역사서인 춘추좌씨전에 나왔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오죽하면 귀신조차 은혜를 갚으려고 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기야 내가 귀신이라도 제 딸의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라도 감사를 표하고 싶을 것 같긴 하지만...

 이 성어에서 귀신, 즉 서모의 친정아버지가 ‘내 딸은 참 운이 좋구나.’라고 여겼다면 은혜라고 여기지 않았을 테니 갚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결국 은혜로 여기고 잊지 않은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닐까?

 지금 이 순간 우연히 좋은 일이, 또는 행운이 일어났다면 제 운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감사의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그 감사의 마음은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한 은혜를 생산해 낼 테고, 그렇게 선의가 이어진다면 그것만큼 아름다운 생산이 또 없을 테니까.


 나는 결초보은에 버금가는 은혜를 입은 일이 있다. 심지어 산 사람이 망자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잡초라도 묶어 은혜를 갚고 싶지만, 죽은 사람을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7년 전 나는 뇌사자로부터 신장 한쪽을 기증받았다. 그때 신장투석을 받은 지 3년을 넘어갈 즈음이었고, 살아간다는 표현보다는 살아내다가 더 어울릴 정도로 하루하루를 견뎌느라 안간힘을 쓰며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내던 내게 뜻밖의 행운, 아니 뜻밖의 은혜가 찾아왔다. 내 혈액형이 o형이었던 까닭에 3년만에 기증을 받은 건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닌데도, 그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람들은 너무 놀라면 이성적 판단이 흐려진다고들 하던데, 내가 딱 그랬으니까.


  그날은 초등학생이던 쌍둥이들이 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막 김밥을 싸기 위해 김밥 속에 넣을 재료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을 때였다. 장기이식코디네이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뇌사자 가족이 기증 의사를 밝혔으니, 이식받겠냐는 것이었다. 망설임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 김밥을 싸고 있어서 곤란하다고 말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대답이었다.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는 내게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을 줄 테니 결정하고 다시 전화를 달라고 했다. 아니면 다음 순번에게 차례가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곧장 타지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 남편의 목소리는 화를 낸다고 느껴질 정도로 격앙되다. 당장 전화해서 받겠노라고 대답하라고, 도대체 말도 안 되는 고민을 왜 하고 있는 것이냐고.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또렷해지며, 곧장 장기이식코디네이터에게 다시 받겠노라 전화를 걸었다.

 이식 이후에 겪었던 모든 일들,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의사와 간호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던 일, 중환자실에 깨어난 일, 수술 후 퇴원하기까지 하루에 몇 차례씩 피를 뽑으며 조마조마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일, 앞으로도 평생 면역 억제제를 먹으며 살아가야 하는 일, 그리고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는 지금의 일상들 가운데 힘든 날이 없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 모든 일은 ‘행복하다’라는 단어의 파생 감정 정도로밖에 되지 않는다. 투석을 하며 보냈던 시간과 이식 이후의 삶은 흑백 세상이 비로소 색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니까.


 그렇다면 나는 잊지 않고 은혜를 갚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채 살고 있을까? 고인에게 은혜를 갚을 수는 없겠지만, 내가 받은 은혜의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주어야만 하지 않을까?

 고귀한 희생에 대한 보답으로 그만큼의 값어치를 가진 무언가로 보답할 자신은 없다. 나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서 나를 희생하고 대의를 이룰 만큼의 깜냥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화장지를 건네주거나, 우산을 빌려주거나, 불우이웃 돕기에 동참하는 것 같은 작은 것들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더 쓰는 것으로라도 갚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소소한 것들을 죄다 모아놓아도 그 은혜에 갈음할 만큼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내가 받은 은혜를 잊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매 순간 확인하며 살고 싶을 뿐이다. 아마 그 은혜 때문에라도 이번 생의 나의 남은 삶은 나쁜 놈으로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귀신이 인간 세상에 나타나 은혜도 갚는다는데, 은혜를 베푼 귀신이 내가 잘 살고 있는지 노려보고 있을지 또 누가 알겠는가?


 結草報恩(맺을 결, 풀 초, 갚을 보, 은혜 은) : 풀을 묶어 은혜를 갚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