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인스타그램에서 한 요가원을 보았다. 한 인친님이 다니고 계신 요가원이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요가원의 이미지와 다른 부분이 많았다. 대여섯 명이 매트를 빽빽하게 펼치면 꽉 찰 정도로 좁은 공간에 어두운 조명을 뚫고 보이는 벽에는 거울이 아닌 엽서 같은 것들이 질서 없이 붙어있었다. 요가원 같기도 하고 가정집 같기도 한 이곳에 궁금증이 생겨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시 문을 닫는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던 그 요가원 계정에 재오픈 소식이 올라온 그날 나는 새로운 요가원을 물색하고 있던 것이다.
문제가 조금 있었다. 운동을 막 시작하는 사람은 무조건 가까운 헬스장을 끊어야 하는 것처럼 초보 수련자인 나에게도 요가원은 가까워야 했다. 그런데 이곳은 무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40분이 걸려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무리였다. 안 그래도 의지박약한 초보자가 40분 거리에 있는 요가원을 등록하면 금방 지쳐버릴 게 뻔하고, 꾸준히 간다고 하더라도 왕복시간이 길기 때문에 자주 가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요가원에 다니다가 새로운 갈증을 느껴 다른 시도를 해보기로 한 것이니 ‘거리’라는 기준을 우선순위에서 잠시 아래로 내려 보기로 했다.
새로운 요가원은 선생님 한 분이 운영하시는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재오픈한 공간 역시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사진과 같이 거울이 없었고, 벽에는 그림엽서 몇 개가 걸려 있었다. 별다른 인테리어 없이 무심한듯 걸려있는 커튼과 라탄 재질의 조명, 그런 모습이 공간을 세련되어 보이게 만들었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수련실로 이어졌고, 최대 7명 정도 수련할 수 있는 넓이의 공간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지만 아늑한 거실, 탈의실 용도의 작은 방, 화장실이 있었다. 선생님은 아담한 체구에 온화한 미소를 띠시는 분이었는데, 내가 본 요가원 선생님들과 달리 딱 붙는 레깅스가 아닌 헐렁한 옷을 주로 입으시고 어딘가 히피스러운 패션을 즐겨 입으셨다. (나는 히피 패션을 잘 모르지만, 왠지 그런 느낌일 것 같았다.) 수업은 빈야사와 하타 이렇게 두 가지 수업만 있었는데 하타 시간에는 한 자세를 유지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는 것 말고는 두 수업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 요가원을 오래 다니게 된 계기는 그런 수업 스타일에 대한 건 아니었다.
요가는 육체적인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것, 사실은 정신적인 수련이 목적이고 그 수행의 결과로 따라오는 것 중 하나가 신체 건강일 뿐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배웠다. 주로 자세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거울이 없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선생님의 요가 수업은 여러 면에서 정신적 수련을 도왔다. 수련 시간 전후로는 거실 공간에서 선생님이 내려주시는 차를 마셨다. 처음 보는 수련생, 자주 만나는 수련생 모두 둘러앉아 선생님이 보이차나 허브차를 내려주시면 돌아가며 찻잔에 따라 마셨다. 차를 미리 내리지 않으시는 날에는 수업 시간 전부터 명상으로 수련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조용한 음악을 틀어주시고 선생님도 명상을 하고 계셨다. 어떤 수업에서는 요가 수련을 마친 뒤 사바아사나(사지를 펼치고 가만히 누워 있는 요가 수련의 마무리 자세) 시간에 싱잉볼 연주를 긴 시간 동안 들려주시기도 했다. 사운드 배스(Sound Bath)라고도 부르는 싱잉볼 소리는 정말로 그 진동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여전히 공연계 프리랜서였기에 일정이 들쑥날쑥한 와중에 일주일에 한 번을 겨우 요가원에 갈 수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끙끙대며 수련을 마치면 다음 날부터 근육통이 생겼고, 뭉침이 풀리며 다시 몸이 말랑해질 때쯤 다음 수련을 나갈 날이 돌아왔다. 그렇게 수련을 마치고 나오면 다시 일주일 살아갈 마음의 힘이 생겼다. 선생님의 수업 덕분에 하타 요가의 매력에 더 깊게 빠지고 있을 때 마침 모든 수업을 하타 요가로 바꾸셨다. 한 자세에서 고요하게 오랫동안 머무르면 힘은 좀 들지라도 일하며 받은 스트레스는 잠시 내려두고 온전히 내 몸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한 자세에서 머무르는 시간은 최소 3분이었다. 3분이란 시간은 그냥 가만히 기다리기에도 긴 시간인데 요가 자세에서 머물러야 한다니 처음엔 엄두가 안 났다.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 두 손을 얼굴 옆이나 가슴 옆 바닥에 짚고 상체만 들어 올리는 코브라 자세(부장가아사나)에서는 그나마 버틸 만 했다. 골반이나 어깨에 비하면 허리는 조금 유연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릎을 바닥에 댄 채로 서서 상체를 뒤로 젖히는 낙타자세(우스트라아사나)에서는 3분을 한 번도 채우지 못했다. 중간에 한 번씩 내려와서 숨을 고르고 다시 자세를 만들어야 주어진 시간을 겨우 채우곤 했다. 하지만 꾸준한 수련은 정말로 선물을 가져다준다. 자주 가지는 못해도 시간이 될 때마다 수업에 나가다 보니 신기하게도 한 번도 내려오지 않고 3분을 채우는 날이 왔다.
나는 요가 자세를 3분 동안 유지하고 싶어서 요가원에 열심히 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정리하는 게 좋아서 휴무 날만 손꼽아 기다리다가 그날이 되면 요가원으로 신나게 달려가기를 반복했을 뿐이다. 그런데 요가 자세가 수월해지는 결과물이 선물처럼 나타났다.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자기 의심이 ‘잘하고 있었구나’라는 자기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런 경험은 스스로 해주는 커다란 위로 같았다. 언젠가 선생님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어요”라고 하셨다. 어딘가에 기대어 얻은 위로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위로가 얼마나 소중하고 큰 힘을 가졌는지 나는 배우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