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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윤미 Oct 25. 2021

인생이 한 폭의 점묘화라면

디카시 “한 점(양윤미)”


한 점


그림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


붓은


수도 없이 점을 찍었다







중국 극동 지방에는 모소 대나무가 있다. 이 대나무는 씨앗이 뿌려진 후 4년 동안 단, 3cm밖에 자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치 3cm 이상은 전혀 욕심내지 않는 나무인 것처럼, 장장 3만 5천4십 시간 동안 고작 3cm짜리 성장을 한 후 그 반경을 좀처럼 벗어나질 않는다.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작고 아담한 성장에 그친다고 모소 대나무를 얕본다면 큰 오산이다. 모소 대나무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크기로 안분지족 하는 종자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씨앗이 뿌려진 후 5년 차부터, 모소 대나무는 매일 30cm씩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그로부터 6주쯤 지나면, 어느새 빽빽하고 울창한 거대한 대나무 숲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


모소 대나무가 4년 동안 한 일은 땅속에 깊이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는 일이었다. 땅 위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키를 재고 두께를 측정할 때, 사람의 측량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 땅 속에서 벌어진다. 더 높이, 더 크게 자라기 위해 모소 대나무는 아낌없이 4년이란 시간을 뿌리내리는 데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고고하게 물 위에서 나아가는 백조의 우아함은 볼 수 있어도, 물아래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쉼 없는 갈퀴질을 볼 수는 없다. 빙산의 일각 만으로는 얼음의 크기가 얼마나 큰 지 알아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통해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라고 말한 명대사가 아직도 우리의 영혼에 큰 울림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진짜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을 떠야 하기에 인생에는 믿음이란 단어가 요긴해진다.


매미 소리가 울창하던 여름, 넓은 정원이 매력적인 한 카페에 갔다. 6-7년을 땅 속에서 굼벵이로 살다가 땅 위로 올라와 오직 사랑을 위해 세레나데를 부르는 한 철 매미들로 정원은 시끄러웠다.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땅 위에서의 삶을 사랑에 바치는 로맨틱한 매미들의 로맨틱하지 않은 외모로 아이들은 무서워했다.


시끄럽던 매미가 날아가고, 아이들은 무섭다면서도 매미를 쫓아갔고, 혹여나 아이들이 넘어질까 남편이 뒤쫓아 달려갔다. 나무껍질에 수놓아진 알록달록한 지의류들이 마치 유화 그림처럼 보였다. 아이들과 남편의 달리기 경주도 한 폭의 그림 같아 보이던 날이었다.


이끼들은 크고 작은 동그라미로, 노랗고 푸르게, 어떤 것은 주홍빛으로 나무를 물들이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크고 작은 점이 생겼을 리는 만무하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는 사이, 너와 나 사이, 그런 사이사이 즈음에 조금씩 나무를 물들였을 것이다. 미묘한 변화가 쌓이고 쌓여 확실한 형상이 되는 그 "사이"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꿈틀거림이 존재했다.


"열정적이십니다."


올 한 해 열정적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연년생 아이들을 키우며 힘에 부쳐도 모자랄 상황이었기에 열정적이란 칭찬이 역설적인 진리로 들렸다. 가장 지치고 힘든 순간, 그럴 때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분명해지기도 한다. 나무에 한 점 한 점 자리를 차지한 이끼들은 깊고 넓게 뿌리내리던 모소 대나무의 시간과 닮아 있었다.


그림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일단 첫 점을 찍어야 한다. 많은 점들이 이어져 선이 되고, 면이 되어 또 다른 차원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내가 찍은 점이 어떤 명화가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으니, 믿음의 눈으로 보자. 보이지 않는 땅 속, 보이지 않는 물속, 보이지 않는 미래와 보이지 않는 내 속을 믿자.


힘들어도 끝까지 붙들었던 붓자루 하나가 그림을 완성할 것이다. 또한 그 그림을 같이 좋아해 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 필의 붓자루가 되어 찍고 싶은 점을 찍자. 생기 발랄하게 점을 찍어도 좋고, 지쳐 쓰러져 드러누운 상태로 점을 찍어도 좋다. 한 점의 명화를 완성하기 위해 도화지 위를 꿈틀거리며 수놓아 가는 것이 삶이다. 지금까지는 겨우 손가락 한 마디 같았던 점들이었어도 괜찮다. 앞으로 얼마나 성장하게 될지, 얼마나 울창해질지, 정말 아무도 모를 일이다.



디카시로 여는 하루




p.s.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응모하느라 한 달 동안 고생 많으셨던 작가님들, 그리고 이번에 응모하진 않았지만 꾸준히 자신만의 색채를 담아 계속해서 좋은 글 발행해주시는 작가님들.... 모두모두... 모소 대나무 같은 분들이라고 감히 제가 응원드리고 싶어요. 다들... 정말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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