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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May 28. 2024

엄마가 가장 후회하는 것 한가지

한국어 공부


사랑하는 딸아, 



너는 며칠 전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안부전화였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시드니 여행 얘기가 나왔고, 엄마는 마침 블로그에 우리의 시드니 여행에 관해서 썼던 편지를 읽어 보라고 링크를 보내 줬지. 


1시간쯤 지나고 나서 네게서 다시 전화가 왔더구나. 엄마가 쓴 블로그 글을 읽고 감동해서 한참 동안 울었다면서. 


엄마는 두 번 감동했다. 


첫 번째는 네가 감동했다고 하는 말에 감동했고, 두 번째는 네가 그 글을 읽었다는데 감동했다. 


엄마가 '딸에게 쓰는 편지'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쓰면서도 네가 언제쯤 그 글을 읽게 될지, 사실 좀 막막했거든. 언젠가 읽게 되리라는 희망은 있었지만 말이다. 


너에게 그 편지의 링크를 보내 주면서도 "얘가 과연 제대로 읽을까? 읽다가 포기하진 않을까?"라는 걱정이 앞섰는데, 너는 용케 읽어 냈더구나. 비록 30~40분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장하다, 내 딸!  


엄마의 오늘 글은 바로 너의 한국어 관련이다. 엄마가 네게 한국어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것에 대한 깊은 후회를 담고 있다. 





너는 어렸을 때 유난히 말이 느렸다. 두 살이 되었는데도 제대로 하는 말이 없었다. 늘 "어버버버"가 다였지. 엄마는 많이 걱정스러웠다. 멀쩡한 아이가 왜 말을 못 하는지 어느 순간부터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떠오른 생각이, '들리는 말이 혼란스러워서 그런가 보다'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너와 있을 때 계속 한국말만 했다. 아빠가 집에 있을 때 우리는 영어를 썼고. 밖에 나가서 들리는 소리는 중국어였다. 우리가 타이완에 살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너는 3개 국어를 들으면서 유아기를 보냈다. 혼란스러웠으리라 본다. 


그 사실을 인지하면서부터 나는 너와 함께 단둘만 있을 때에도 일부러 영어를 썼다. 딱히 잘하는 영어는 아니었지만, 아기한테 하는 영어가 그렇게 대단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그랬더니 약 3개월 후부터 말문을 트더구나. 물론 영어로! 그때는 나의 그런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니더구나. 


한참 나중에 어떤 언어 전문가가 그러더라. 다중언어를 쓰는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말을 배우는 속도가 늦다고 말이다. 아무래도 여러 가지 언어가 머릿속에 들어오니, 그걸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시간이 좀 더 걸릴 뿐, 여러 가지 언어를 못 배우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다중언어를 자연스럽게 접하다 보면, 또 자연스럽게 익혀서 하게 된다는 거지. 


엄마가 진즉에 이 이론을 알았더라면 그때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엄마는 너무 늦게 알았다. 







그렇다고 되돌릴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네가 예닐곱 살 되어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무렵. 엄마는 프랑스인과 국제결혼한 엄마를 알게 됐다. 


그 엄마가 그러더구나. 자신의 아들은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때 아빠를 보면서 불어를 말하고, 자신을 보면서 한국어로 말한다고. 그리고 학교에서는 영어를 말한다더구나.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자신도 놀라울 정도라고 했다. 


엄마는 많이 부러웠다. 비결을 알려달라고 했지. 그 엄마가 그러더라. 자신도 아이가 4살 무렵까지는 불어를 썼는데, 어느 날 불어만 하는 아이를 보면서 "내 아이가 아닌 것 같다"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부터 무조건 한국어를 쓰기 시작했다는데... 물론 처음에는 아이가 엄청나게 불편해했다더라. 엄마를 외계인 보듯이 하면서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더구나. 그러다가 차츰 엄마의 말을 이해하면서 자신도 따라 하기 시작했고. 


나도 어느 날 그 아이를 봤다. 한국말을 정말 자연스럽게 잘하더구나. 생긴 것은 완전히 프랑스 아이같이 생겼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도 힘을 얻었지. 너에게 한국말로만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모질지 못했다. 줏대도 꾸준함도 그 엄마에 한참 못 미쳤지. 엄마가 한국어로 말했을 때 네가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되면 얼른 영어로 설명해 주곤 했지. 


무엇보다 내가 너에게 한국말만 하기 시작했을 때 너는 학교에 다니던 때라, 엄마랑 지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거의 하루 종일 학교에서 생활하거나 영어를 하는 친구들과 놀았으니 말이다. 




엄마는 한국어 교재를 구입하고, 한국어 동화책도 구입해서 네게 읽어주면서, 나름 노력이라는 것을 했지만, 생각해 보니 역부족이었다. 너는 이미 영어에 익숙해져서 한국어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심지어는 네 한국어를 위해 1년 정도 한국에 들어와서 살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해봤다만, '어떤 경우에도 가족이 떨어져 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네 아빠의 생각을 알고 있었기에 말도 꺼내보지 못했다. 


대신 한국에 자주 방문하긴 했지. 어느 해는 한 달 넘게 한국에 머물기도 했고. 네가 한국어를 이 정도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런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때 네가 배운 한국어 때문에 엄마는 배꼽을 잡고 웃었지.


"엄마, 응가가 학교에 갔나봐. 지금 안나와!"


"엄마, 응가가 학교에 간 줄 알았는데, 안 갔나봐. 나는 쉬야만 하려고 했는데, 응가까지 그냥 나와버렸어!"


"엄마, 빤스가 너무 작아서 똥꼬에 끼어!"


참, 수준높은 한국어였다. 




우리가 한국으로 이사 오고 나서, 나는 네 한국어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만, 그건 역시 엄마의 순진한 희망이었다. 너는 여전히 외국인 학교에 다녔고, 친구들도 전부 영어를 쓰다 보니 한국어는 생각만큼 늘지 않았다. 


엄마는 한국에 오고 나서는 아무래도 한국말을 많이 쓰게 됐지. 모국에서 모국어를 쓰는 게 그만큼 자연스러웠으니까. 


그런데 계속 한국말만 쓰는 엄마가 불편했던지 너는 엄마보다 아빠랑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물론 그게 한국어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본다. 그 당시 엄마는 갱년기 증상이었는지, 알 수 없는 공허함으로 짜증 내는 일도 많았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빠랑 더 친하게 지냈던 거지. 


어느 날, 정확하게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짜증을 내는 너에게 엄마는 한국말로 일장 훈계를 했었지. 나는 우습게도 내 말에 스스로 도취됐다. 


"와, 내가 이런 멋진 말도 다 하네!"라는 생각으로 네가 이해하고 감동받았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너는 그때 엄마를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엄마가 한 말,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어!"라고 영어로 말하면서 돌아서더구나.


그때 엄마는 을 느꼈다. 너와 나 사이에 놓인 거대한 벽! 좀 심하게 표현하면 그 벽이 영원히 우리를 가로막고 있을 것만 같았다. 너와 내가 사는 세상이 달라 보였을 정도였으니까. 


그 이후에도 엄마랑 너는 여러 번 말의 내용이 아니라 '언어 자체'때문에 다투곤 했다. 너는 엄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에 온 이후로 가뜩이나 부족했던 엄마의 영어는 갈수록 녹슬어 갔지만,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네 영어는 갈수록 고급져 갔다. 또 내가 전혀 모르는 슬랭도 많이 사용했지. 


엄마가 네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네가 짜증 내는 횟수도 늘어갔고, 그러면 엄마는 엄마대로 그 서운함을 분노로 표현하곤 했던 것 같다. 우리 관계는 점점 나빠져 갔고. 




그런 너를 보면서 엄마는 어릴 때 너에게 한국말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 프랑스 엄마가 "내 아이를 잃은 것 같았다"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절절하게 이해하면서 말이다. 


물론 내가 이런 서운함을 다른 한국 엄마에게 말했을 때, 그 엄마들은 그러더구나. "사춘기 아이들은 같은 언어를 써도 마찬가지예요. 서로 이해하지 못해요!"라고. 그 말이 조금 위안은 됐다마는 그 벽의 존재는 여전했지. 


아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내가 가장 우려했던 점 중 하나도 바로 너와의 관계였다. 


너와 나 사이에 놓인  '언어의 벽'이 우리를 계속 갈라놓을 것만 같았거든. 아빠가 살아 있을 땐 그나마 아빠가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다리' 역할이라도 했지만, 아빠가 없는 세상에선 누가 그런 역할을 해줄까 싶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그런데 우리의 절박한 현실이 우리를 더 연결시켜 준 것 같다. 너와 나는 힘써 그 벽을 부수었다.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아빠가 없는 현실은 우리를 더 가깝게 했더구나. 너와 나, 우리 밖에 없었으니까. 


결국은 언어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였다. 나도 너를 이해하려 애썼고, 너도 엄마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너였지 싶다.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거든.


네가 지난해 이모에게 엄마에 대해 묻고 또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네가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 물론 엄마를 이해하고 싶다는 네 욕구가 먼저였겠지만 말이다. 


다만 이번에도 아빠가 하늘에서 가교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한 사람을 사이에 두고, 추억을 공유하면서 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보다 힘이 세더구나. 견고해 보였던 벽을 부술만큼 말이다. 


딸아, 


이제 나는 너에게 벽을 느끼지 않는다. 


누구보다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 같다는 생각도 한다. 엄마에게 네 남자친구 얘기며 온갖 얘기를 다 하는 너도 엄마가 친구 같니? 그랬으면 좋겠구나. 


마지막으로 이 말을 빼먹을 수 없겠구나.


"내 딸로 태어나 줘서 고맙다


2024년 5월 28일,


엄마가 


#모녀관계 #한국어 #다중언어 #언어의벽 #대화 #추억 #사랑 #딸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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