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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May 23. 2024

우리의 희망여행

호주 시드니


사랑하는 딸아, 



엄마는 최근에 영화 한 편을 봤다. '스페인 어게인'이란 영화였다. 


그 영화에선 암으로 세상을 떠난 중년의 엄마와 10대 후반인 그 딸, 그리고 그 엄마의 친구인 여성 세명이 나온다. 세 명의 친구와 딸이 함께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추억을 되짚는 여행이기도 했지만, 희망을 찾는 여행이기도 했다. 목적지는 스페인의 팔마 성당이라는 곳이지만, 영화 중간중간에 파리의 이곳저곳이 나오더구나. 


우리 가족이 아빠가 세상을 떠나던 해 7월에 갔던 에펠탑 주변과 샹젤리제 거리. 그리고 스위스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갔던 리옹역까지. 


잠시 그때를 생각하며 추억에 잠겼다. 


그리고 너와 내가 아빠가 세상을 떠난 뒤에 처음으로 떠났던 여행을 떠올렸다. 




호주 시드니 여행. 


아빠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째 되던 그 해 12월 중순. 방학을 맞은 너를 위해 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매년 12월 중순마다 해 오던 가족여행을 단지 아빠가 없다는 이유로 빼먹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너도 동의했지. 어쩌면 더 좋아했고. 


그러나 여행지를 두고 우리는 '아빠랑 함께 가보지 않은 곳'을 1순위로 꼽았다. 아빠랑 함께 갔던 곳은 '발길 닿는 곳마다 슬픔이 묻어나서 가볼 수 없을 것 같다'라는 게 우리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래서 정한 곳이 호주 시드니였다. 호주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거든. 



처음에는 우리 둘만 가기로 하고 계획을 세웠지만, 마침 시간이 맞았던 엄마의 대학 친구도 그 여행에 동행했다. 평소에 호주에 가보고 싶었지만 못 가봤다고 하면서. 


나는 그 여행을 하기 전에 내심 걱정이 많았다. 


그때는 너도 나도, 서로의 슬픔을 드러내기 보다 감추고 있을 때였다. 너는 너대로 우울해했고, 나는 나대로 슬퍼하느라 서로의 슬픔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러니 평소 우리의 대화는 자주 끊겼고, 이 여행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과연 즐겁기나 할지 많이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그 여행은 예상 밖으로 참 즐거웠다. 


너도 나도 많이 웃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사진도 찍고, 무슨 플리마켓에서 캥거루 고기랑 악어 고기도 먹었다. 사막에 가서 모래 스키도 타고, 돌고래 구경도 갔었다. 


물론 햇빛이 쨍쨍 내려 쪼이던 무더운 날, 무슨 바위를 보러 가면서 "너무 덥다"고 투덜거리는 너에게 엄마가 야단을 치기도 했지. 너는 당연히 기분이 상했고. 


또 시드니 시내의 화장품 매장에서 쇼핑을 할 때는 "물건 하나를 고르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다"면서 엄마가 불평을 했고, 너는 그런 엄마를 못마땅해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친구, 정수 이모가 가교 역할을 해줬다. 천성이 밝고 쾌활한 친구여서 우리 둘 사이에 냉기가 흐른다 싶으면 즉시 그 냉기를 차단하고 온기를 불어 넣었지. 냉기를 웃음으로 바꾸는 신기한 재주가 있는 듯싶었다. 


무엇보다 아들만 셋인 이 친구는 너를 너무나 예뻐했다. 화장품 매장에 함께 들어가 화장품을 고르고, 같이 발라도 보고, 이쁘다고 감탄도 해주면서 말이다. 평소에 예쁜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너를 보면서 마치 친 딸처럼 좋아해 주더구나. 


어쨌거나 이 친구 덕분에 우리 여행은 내내 즐거웠다. 





우리 호주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시드니의 상징 중 하나로 꼽히는 '하버 브리지'였지. 그 철제 다리를 오르기 위해 갔지만, 우리는 표가 없었다. 





표를 왜 안 샀는지, 너무 비싸서 못 샀던 건지 확실하지 않다만, 우리가 아쉬운 표정으로 포기하고 돌아 서려는 순간, 관리인이 표 3장을 그냥 주더구나. 특별 서비스라고 하면서. 


그때 우리는 그 철제다리를 오르면서 환호성을 질렀지. 우리의 미인계가 통한 것 같다면서. 특히 내 친구는 너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네가 제일 이쁘고 제일 어리니 네 덕분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때 너도 참 많이 웃었다. 


그 철제 다리 위에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며,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엄마는 마음속에 맺힌 무언가가 툭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너도 그랬던 것 같다., 


너는 당시 그 다리 밑에서 찍은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면서 "다시 여기에 올 것 같다. 아마도 여기 있는 대학에?"라고 썼다고 했지. 


너는 그 여행을 한 지 3년 후 우여곡절을 거쳐 호주에 있는 대학에 합격 통지서를 받고 나서, 그 인스타를 내게 보여주더구나. "엄마, 너무 신기하지?"라고 말하면서. 


엄마도 너무 신기했다. 살다 보면 '우연 같은 필연'이 있는 것 같더니, 그때 우리의 호주 여행도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던져 준 '우연 같은 필연'이 아니었나 싶다. 


아빠 없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우리 두 사람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 우리 둘 다 그 호주 여행에서 이 메시지를 찾았던 것 같다. 






다시 영화 '스페인 어게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영화에서 주인공 여성 4명이 가는 곳은 팔마 성당이라는 곳이다.


이 성당에는 1년에 단 한차례 태양의 각도 때문에 성당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반대편 벽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낸다. 


이 아름다운 햇살을 보기 위해 가는 여행에서 4명의 여성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다. 기차를 놓치고, 여권을 잃어버리고, 목적지가 아닌 이탈리아로 가버리기도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출산을 돕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지.


결국 화해 과정을 거쳐 오토바이도 타고, 남의 배를 훔쳐서 타는 모험을 감행해 가면서 아슬아슬하게 팔마 성당에 도착해서 그 빛의 향연을 보게 된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엄마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우리가 목적지를 알고 포기하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반대편에서 올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너는 언젠가 뉴욕에 간 친구들을 부러워하면서 네가 뉴욕에 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네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생은 살아 봐야 아는 거고, 어떻게 살지는 네 마음에 달려 있다. 


부디 후회하는데 네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바란다. 


무엇보다 너에게 호주는 '우연 같은 필연'이자 '희망의 상징'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누가 아니. 네 인생의 반대편에서 밝은 빛이 비칠지!!!


엄마도 정수 이모도 다시 한번 '시드니 어게인'을 기대하면서 너의 행복과 건강을 빌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아빠와 함께 갔던 파리도 꼭 다시 한번 가보자꾸나. 


2024년 5월 23일 


엄마가 




#스페인어게인 #팔마성당 #여행 #파리 #시드니 #호주 #희망여행 #우연 

#필연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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