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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May 30. 2024

엄마가 외할머니에게서 배운 교훈


안녕, 딸!



엄마가 보내 준 글은 잘 읽고 있지?



엄마가 지난번에 쓴 글을 읽고 블로그 이웃들 중 자신의 엄마가 생각난다고 하는 분들이 꽤 여럿 있었다. 그 말을 듣다 보니 엄마도 엄마의 엄마, 즉 네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너는 외할머니에 대해서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네. 물론 그게 네 잘못은 아니지만 말이다.



외할머니는 네가 네 살 때 돌아가셨다. 그 사이에 네가 외할머니를 본 적은 서너 번 될까?



네가 6개월 무렵 아빠의 직장 때문에 우리가 타이완으로 이주해 갔으니,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외할머니를 볼 기회가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너를 품에 안아 본 것도 서너 번에 불과할 것 같다


그나마 너무 어렸을 때라 너는 기억도 안 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너는 한 가지에 대해서는 외할머니께 감사해야 할 것 같구나. 바로 네가 태어난 것은 외할머니의 공이 크다는 거다.


엄마와 아빠는 결혼하고 나서, '아이를 가지지 말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지.그때 외할머니는 엄청나게 화를 내시더구나. 도대체 왜 아이를 가지지 않느냐고 엄마를 볼 때마다 야단쳤다.



외할머니가 걱정한 것 중 하나는 "그 서양 놈을 어떻게 믿고 아이도 가지지 않는단 말이냐?" 였지. 외할머니는 아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였는지 아빠가 언제든지 떠날 사람으로 여겨졌던가 보다.



아빠가 결국 떠났고, 그래도 네가 남았으니, 외할머니 말 듣기 잘했다 싶다. 그러니 너도 외할머니께 감사하기 바란다. 네가 태어나는데 큰 공을 세운 분이니 말이다.




외할머니는 소박하고 부지런하고 순한 분이셨다.


일제강점기때 가난한 시골 가정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엄마들처럼 외할머니도 배움이 짧았다. 딱히 학교라고는 다니지 못했고, 야학에서 겨우 글자를 깨우쳤을 정도였다.


외할머니의 남동생은 대학까지 나왔고, 여동생들도 중고등학교를 다닌 걸로 봐서, 외할머니가 그 집안의 장녀로 희생하지 않았나 싶다. 어렸을 때부터 살림을 도맡아 했다고 했으니까.


지금도 생각난다. 외할머니가  달력에 각종 제사며 '겟돈'이라고 적어놓았던 삐뚤빼뚤한 글씨가. 참고로 외할머니가 '겟돈'으로 잘못 적었던 '곗돈'은 예전에 돈을 모으던 한 방법이다. 요즘으로 치면 '적금' 정도 되겠구나.


외할머니는 늘 돈이 부족했지. 외할아버지는 돈 모으는데도, 자녀교육에도 별 관심이 없었거든. 그래서 늘 자녀들 공부시키는데 돈이 없을까 봐 전전긍긍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외할머니가 자녀들에게 큰 기대를 가졌던 것 같지는 않다. 엄마에게 늘 하던 말씀 중 하나도 "은행에 취직해서 돈이나 많이 만져봐라"였거든. '돈을 많이 벌어서 잘 살아라'도 아니고, '돈이나 많이 만져보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좀 기가 막히지만, 그게 외할머니가 상상할 수 있었던 한계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가장 자주,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엄마처럼 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는 게 그만큼 고되고 힘들어서 그랬지 싶다.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딱히 공부하라고 닦달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처럼 살지 말라'는 말 자체가 '너는 공부 열심히 해서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아라'는 뜻으로 엄마는 받아들였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했지만, 엄마는 외할머니를 보면서 자랐지. 외할머니의 삶 자체가 엄마에게는 하나의 교훈이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콩밭 매던 엄마, 겨울이면 갯바위를 타고 다니면서 살림에 보태기 위해 돌김을 뜯던 엄마... 온갖 힘든 일을 다해가며 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 애쓰던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도 열심히 사는 것을 당연시 여기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힘든 일을 한다고 해도, 외할머니가 한 고생에는 못 미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살았다. 외할머니의 삶은 그만큼 고달팠으니까.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중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사나 명절 즈음이었던지, 외할머니랑 엄마가 장을 봐서 잔뜩 머리에 이고 오던 때였다. 외할머니가 무거운 것을 머리에 이고 오고, 나는 비교적 가벼운 것을 들고 왔지. 그때는 차도 다니지 않던 때라 30~40분을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다.


3분의 1쯤 걸어왔을 때 나는 외할머니의 얼굴에 땀이 흐르는 걸 봤다. 많이 힘들어 보였지. 그래서 "엄마, 그거 나한테 줘. 내가 머리에 일게"라고 했지. 그때 우리 엄마가 그러더구나.


"엄마가 조금만 더 이고 갈게. 동네가 보이는 곳에서부터 니가 이고 가라!"


외할머니는 내가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를 바라셨던 게지. 그때부터 내가 짐을 이고 가면 어차피 동네에 가까워졌을 때 다시 바꿔야 하니까 말이다. 나는 그때 뭔가 가슴이 찡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외할머니는 딱히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 주셨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요란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무심한 듯 따뜻한 사람에 가까웠다. 지금의 엄마 모습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자식에게 딱히 뭔가를 강요하는 분도 아니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라 '생존' 자체에 더 관심이 컸다고 볼 수도 있다. '성장'이라는 것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내가 너에게 뭔가를 강요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우리 엄마의 이런 성향을 물려받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외할머니가 자식들에게 뭔가를 강요하지 않는 데는 슬픈 사연도 있다.


외할머니는 5남 3녀를 출산했지만, 그중 1남 1녀가 어릴 때 사망했다. 특히 외할머니가 두 번째로 낳았던 딸, 즉 나에게 큰 언니 되는 사람은 8살 때인가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더구나. 그것도 설을 앞두고 설빔으로 마련한 색동 한복도 입어보지 못한 채 말이다.


외할머니는 그 부분을 항상 안타까워하셨다. "아이가 그렇게 입어보겠다고 하는 걸 설에 입으라고 말렸더니, 결국 입어보지도 못하고 갔다"라면서.


그러니 외할머니는 엄마에게도 "입고 싶은 게 있다면 마음껏 입어라. 나중 생각하지 말고"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외할머니는 아들보다 딸을 좋아했던 것 같다. 첫째 딸을 잃은 슬픔이 커서인지, 외할머니는 그 이후 딸 하나를 더 낳았지. 바로 이모다. 하지만, 또 다른 딸을 원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엄마가 막내로 태어났으니, 외할머니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싶다. 외할머니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그런 표현으로 엄마의 존재가치를 살려주곤 했다.


엄마가 너를 낳아서 키울 때, 보는 사람마다 네가 이쁘다고 난리였지만, 외할머니만은 너보다 내가 더 이쁘다고 했다.


"우리 딸을 닮았으면 더 예쁠 텐데, 지 에비를 닮아서 눈만 크다"는게 외할머니의 표현이었다. 푸하하하하! 고슴도치 엄마였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엄마가 외할머니에게서 배운 것은 삶의 태도였다. 아무리 고된 인생이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살다 보면 희망이 생긴다는 걸 우리 엄마가 나에게 보여 줬듯이 나도 너에게 보여주고 싶구나.  


외할머니에 대한 얘기는 여기서 그치기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줄일게.  


건강해라.


2024년 5월 30일


엄마가


#딸에게쓰는편지 #외할머니 #우리엄마 #모녀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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