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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Jun 06. 2024

눈물의 삼겹살 기억나니?


딸아, 잘 지내니?


지난 번에 시드니 한국 식당에 가서 삼겹살 먹는다더니, 맛있게 잘 먹었니? 


엄마도 오늘 친구들 불러서 우리 집 정원에서 바베큐 파티를 했단다. 이 맘때가 바비큐 해먹기 가장 좋을 때거든. 맛있게 먹다 보니, 우리 가족이 주말마다 즐겼던 삼겹살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더구나.  



아빠는 삼겹살 마니아였지. 덕분에 우리의 외식은 거의 대부분 삼겹살로 채워졌고. 타이완에 있을 때도 걸핏하면 삼겹살집에서 외식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나니? 이름이 아마 '고려미'였지. 그 한국 식당에서 거의 1주일에 한 번씩은 삼겹살을 먹었던 것 같다. 삼겹살에 소주 1병을 시켜서 먹다가 부족해서 또 한 병을 시키고, 남은 반병 정도를 가방에 넣어왔다, 그곳에선 소줏값이 비쌌으니까. 


냉동 삼겹살이라 한국의 생삼겹살에 비하면 그렇게 맛있는 것도 아니었겠지만, 우리에겐 더없이 맛있는 음식이었다. 


나는 네 아빠처럼 삼겹살을 좋아하는 외국인은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내가 외국인을 다 아는 것은 아니겠지만, 주변에 국제결혼한 엄마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아빠의 삼겹살 사랑이 단연 돋보였다. 


평소에 밥과 김치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아빠였지만, 삼겹살 먹을 때만은 예외였다. 삼겹살에는 밥과 김치를 곁들여야 제대로 맛을 즐길 수 있다고 하더구나. 소주야 두말하면 잔소리고. 


그런 아빠였던지라, 한국에 오고 나서는 주 1회가 부족할 정도로 삼겹살을 즐겼지. 주중에는 연희동의 식당에서, 주말에는 우리의 전원주택에서. 


우리 전원주택에는 다행히도 바비큐장을 따로 만들어 삼겹살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놀러 와도 메뉴는 당연히 삼겹살이었다. 물론 목살도 있었지만. 


엄마는 가끔씩 우리가 전원주택을 지은 이유가 삼겹살을 구워 먹기 위함이 아니었나라는 생각까지 들더구나. 아빠뿐만 아니라 너와 나도 삼겹살을 즐겼고. 





그렇게 좋아하던 삼겹살을 우리는 1년 정도 먹지 못했다. 


아빠의 최애 음식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빠가 먹은 마지막 음식이 삼겹살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빠가 세상을 떠났던 그날. 우리는 40분을 걸어 우리가 좋아하던 강변 식당에 갔다. 한겨울이라 우리 바비큐장은 개점휴업 상태였거든. 


그 식당에서 우리는 참 즐겁게 삼겹살을 먹었다. 소주를 곁들여서 말이다. 식당 주인이었던 털보 아저씨는 그날 유난히 친절하게 이런저런 반찬을 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술을 안 먹는 너에겐 집에서 담근 매실음료도 서비스로 나눠 줬지, 아마? 


그리고 집으로 와서, 저녁 무렵에 아빠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너와 내가 겁에 질려 했던 심폐소생술도 빛을 보지 못했고. 


그러고 나서 우리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삼겹살은 쳐다도 안 봤다. 입에 올리지도 않았지. 


네 스웨덴 친구 미미 엄마가 몇 주 후에 뒤늦게 상황을 전해 듣고 그러더구나. 그래도 아빠가 자신이 제일 좋아하던 음식을 마지막으로 먹고 가서 다행이라고 말이다. 엄마도 동의했다. 정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조금 위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삼겹살을 먹을 정도는 안됐다. 






1년이 지나고  우리는 이모집을 방문했다. 그 1년 동안 우리는 한국에 있는 친척 집 방문도 일절 안 했다. 그 추억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아마도 그때는 호주 시드니에 다녀온 뒤여서인지, 이모집이랑 엄마의 고향 집에 갈 용기가 생겼던 것 같다. 


이모집은 우리에게 삼겹살 성지였다. 


타이완에 살 때 항상 냉동 삼겹살만 먹던 우리에게 사천 이모집 근처의 생삼겹살 식당은 삼겹살 맛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줬지. 


우리가 여전히 타이완에 살던 어느 해. 이모집을 방문해서 그 삼겹살집에 갔을 때. 이모와 이모부는 우리가 삼겹살 먹는 모습을 보고 "걸신들린 사람들 같았다"라고 표현하더구나. 


우리 셋이 고기가 굽히기 무섭게 집어먹는 바람에, 이모와 이모부는 그저 우리가 먹는 모습만 보고 있었다는데, 나도 아빠도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맛있었으면 그랬나 싶다.  


아빠가 세상 떠난 지 1년 후, 이모 집에 갔을 때도 습관처럼 바로  그 집에 갔다. 주문한 삼겹살이 나오고 적당히 굽힌 삼겹살을 먹기 시작했을 때, 너는 삼겹살을 먹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너의 큰 두 눈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빠 생각이 난다면서. 


아마도 그때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차마 말을 못 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네 눈물이 신호탄이 됐다. 엄마도 이모도 펑펑 울기 시작했지. 


이모는 울면서 꼭 넋두리하는 습관이 있더구나. 그때도 그랬지. 


"크서방, 자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라고.  


이모의 그 넋두리에 우리는 더 설움이 복받쳤고, 식당 종업원이며 주변 손님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기도 했다. 


남자라는 이유로 잘 울지 않던 이모부까지 입에 넣었던 삼겹살을 차마 뱉어내지 못하고 우물거리며 눈이 촉촉해지던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그날 그렇게 우리는 눈물에 젖은 삼겹살을 먹었다. 


그래도 그때 흘린 그 눈물은 우리를 슬픔에 가두거나, 뒤로 가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현실을 똑바로 마주 보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했지. 


무엇보다 같이 추억을 공유하고 같이 슬퍼해주는 사람이 있다는데 우리는 적잖이 위로를 받지 않았나 싶다. 






딸아, 엄마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단다.


아빠의 죽음으로 우리는 큰 나무 한 그루를 잃었지만, 여러 개의 작은 나무를 발견했다고 말이다. 아빠라는 큰 나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작은 나무들이 아빠의 죽음으로 눈에 띄었지. 


엄마의 가족, 엄마의 친구들이 이 작은 나무들 같더구나. 작은 나무들은 늘 거기에 있었지만, 아빠 나무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던 나무들이다. 


우리는 이제 그 작은 나무들의 도움으로 살아가게 될 것 같구나. 


아빠 나무처럼 그늘도 풍성하지 않고, 우리가 마음 놓고 기대지도 못하겠지만, 울타리가 되어주기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작지만 여러 겹이거든. 물론 우리도 그 작은 나무들을 도와야겠지. 우리는 다 고만고만한 울타리의 일부라서 말이야.  


딸아, 사는 게 그렇다. 


하나를 잃으면 또 다른 하나를 얻는 게 인생이거든.  그러니, 이미 잃은 것에 대해 너무 연연해 하지 말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살자꾸나. 


삼겹살도 마음껏 먹으면서! 오늘 친구들과 함께 먹은 삼겹살도 맛있었다. 


2024년 6월 6일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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