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도깨
안녕, 딸!
어제 네 카톡 메시지를 받고 기뻤다.
중학교 때의 사진과 고등학교 때의 사진, 그리고 최근의 사진을 보내왔더구나. 너도 말했다시피 최근의 네 표정은 확실히 밝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중학교 때의 사진은 반대로 많이 어둡고 우울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나이도 더 들어 보이더라.
그래서 엄마가 "중학교 때가 더 나이 들어 보여!"라고 농담까지 했지. 너도 인정했고.
네 표정을 보면서 엄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
무엇보다 네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 것 같아서 엄마는 마음이 놓이더라.
너는 어릴 때부터 불안이 참 많은 아이였다.
시험을 앞두고선 항상 좌불안석이었지. 시험을 못 칠까 봐 불안해하고, 시험공부를 다 못할까 봐 걱정하고. 그것도 모자라 가끔 울기까지 했다.
엄마가 일등 하라고 한 적도 없고, 시험 잘 봐야 된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지 참 이해가 안 가더구나. 엄마는 시험 때문에 불안해해본 적은 없었거든.
네 불안이 최고점에 달했을 때가 아마도 고등학교 때였지?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우리 둘 다 힘들었던 그때. 너는 네 능력과 네 미래에 대해 많이 불안해했던 것 같다.
갑자기 수학 성적, 과학성적이 뚝뚝 떨어지면서 너는 아마도 스스로 못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뭘 해도 안될 것 같은 불안감.
물론 나는 그걸 몰랐다. 네가 슬퍼하는 건 이해했지만, 그렇게까지 자신감을 잃어버릴 줄은 몰랐지.
네가 대학 원서를 써야 하는 시점에서 "엄마, 내가 대학을 갈 수 있기나 할까?"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기가 막혔지. 그 똑똑했던 아이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나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는 그때 '불안 도깨비'라는 괴물에 잡혀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오늘 <유리 멘탈을 위한 좋은 심리 습관> 이란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 '불안 도깨비'라는 말이 나오더구나. 단어가 너무 재미있지? 우리가 함께 즐겨 봤던 드라마 <도깨비>도 아니고, '불안 도깨비'라니!
'불안 도깨비'가 뭐냐 하면, 불안을 부정하고 싶어서 더 커진 불안을 말하는 거란다.
너는 그때 불안한 게 당연했다.
평소에 너를 매일 칭찬해 주던 아빠도 없었고, 아빠처럼 수학이며 과학을 잘 가르쳐 주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평소 잘 하던 과목의 성적이 뚝 떨어지면서 너는 불안감에 휩싸여 버렸겠지. 나중에는 그 불안감이 무서워서 더 불안해졌고 말이다.
'불안 도깨비'의 원리가 그렇다는구나. 자신의 불안을 인정하지 않고, 그 불안을 부정하고, 그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 치다가 더 불안해지는 현상이래.
책을 쓴 저자는 '불안해서 고민이라는 사람의 90%가 이 '불안 도깨비'에 잠식당해 있다고 말하는 구나.
네가 그 '불안 도깨비'에 잠식당해 있는 동안 엄마는 도대체 뭘 했을까?
사실 엄마도 몰랐다. 네가 그렇게까지 불안해하는지도 몰랐고, 불안의 원리도 몰랐지. 불안을 무시하거나 약해서 그런 거라고 비난하면 더 불안해진다는데...
어쩌면 엄마가 네 불안을 더 키운 주범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네가 약해서 불안해한다'라고 생각했거든. 정말 미안하구나.
알보 보면 불안은 '내비게이션' 같은 거래.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설정해 놓고 길을 잘못 들어서면 내비 언니가 '경로를 재탐색'한다고 하잖니. 그리고 수정된 길을 알려주지.
엄마가 서울에 갔다가 양평 올 때는 항상 이 내비 언니랑 싸우지. 내비 언니 말을 안 듣고 항상 내가 좋아하는 길로 와버리거든. 그럼 내비 언니가 계속 '경로를 재탐색'한다고 난리더라. 그럼 나는 '그 입 닥치라'고 말하고.
언젠가 너는, "엄마랑 내비랑 싸우는 게 너무 재미있다"고 말한 적도 있는데, 기억나니? 어쨌든 엄마랑 내비가 싸운 게 중요한 건 아니고.
중요한 것은 불안도 전부 의미가 있어서 생긴 것이니, 적이라며 멀리할 게 아니라, 사이좋게 지내며 이용해야 한다는구나.
다행히 너는 요새 이 불안이랑 사이가 좀 좋아진 것 같더라.
지난번 겨울 방학 때 네가 한국에 왔을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한 네 불안과 걱정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아마도 무슨 직업을 가질 것인지, 그 직업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인지 등등에 관한 얘기였지. 너는 "잘 안되면 어떡하냐"면서 걱정이 태산이었고.
그때 엄마는 "왜 그렇게 걱정과 불안을 사서 하냐"라고 말했지.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까지 미리 당겨서 걱정하지 말고, 현재의 일에만 충실하란 뜻이었다.
너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마디 하더구나.
"엄마, 나도 알아. 내가 불안이 많은 사람이라는걸!"
그때 엄마는 희망을 봤지. 사실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은 문제를 자각하는 것이거든. 네가 스스로 불안하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그 불안을 어떻게 해결할지는 시간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스스로 불안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해결책도 나온다더라.
어쩌면 네 불안은, 완벽하고자 하는 네 성향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거든. 뭐든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네 불안을 키우는 것일 수도 있어.
그러니 이제부터 뭐든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좀 실수해도 괜찮아. 시험 칠 때도 모든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필요도 없다. 네가 노력하는 과정에서, 또는 그 결과에서 배운 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거든. 혹시 다른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을까 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마라. 미래는 현재의 반영이다. 네가 지금 현재에 충실하다면, 미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혹시 네가 생각한 대로 미래가 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조차 너무 걱정하지 마라.
때때로 삶은 너를 시험에 들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이 너에게 더 좋은 것을 준다는 믿음이 있다면 너는 더 행복해질 수 있단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엄마가 그렇게 살고 있거든. 살다 보면 그걸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엄마가 내비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좋아하는 길을 가도, 길을 잃지 않고 집에 잘 도착할 수 있듯이 말이다.
부디 네 마음속 불안을 내비게이션 삼아 가장 행복한 길을 찾기 바란다.
2024년 6월 11일,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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