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소공 Jun 04. 2024

외할머니의 그 한마디 때문에...


딸아, 



요즘 잘 지내는지 통 연락이 없구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으니, 너한테서 연락이 없으면 엄마는 네가 잘 지내는 걸로 생각하고 있단다.


별일 없는 거지?


지난번 외할머니 얘기는 읽었니? 오늘도 지난번에 못다 한 네 외할머니 얘기다. 


외할머니는 엄마를 크게 야단친 적도 없고, 강요한 적도 없었다만, 두 번 정도 '말'로 엄마를 뒤흔든 적이 있었더구나. 한번은 크게 깨우쳐 주고, 한번은 크게 상처를 준 경우였다. 


그때가 아마 엄마가 사춘기 무렵이었지 싶은데. 엄마는 네 외할머니가 참 만만했던 것 같다. 상당히 버릇없이 굴었지. 도무지 싫은 소리를 잘 안 하던 분이다 보니, 너무 편해서였겠지. 


그날은 정확하게 무슨 일이었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외할머니한테 험한 소리를 하면서 대들었던 것 같다. 


그때 외할머니가 그러더구나. 


"니도, 니 인격을 생각해야제. 엄마를 그리 함부로 대하면 쓰겠나?"


그 순간 나는 뭔가가 머리를 세게 때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우리 엄마가 그렇게 유식한 말을 하는 걸 그때까지 들어 본 적이 없었거든. 게다가 '인격'이라니!


그때부터 나는 이 '인격'이라는데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대단한 인격 연마를 했다는 건 아니고. 다만 우리 엄마한테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는 건 알았지. 실제로 그렇게 했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외할머니한테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게 되면서 엄마는 외할머니와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다. 가뜩이나 말이 없는 편이었는데, 더욱더 말을 안 하게 됐지. 


그전까지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우리 엄마는 다 받아 주겠지'라고 생각했다면, 그때 이후로는 뭐랄까. '더 이상 내 못난 모습을 엄마에게 보이지 말아야지'라는 마음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엄마는 어쩌면 외할머니와 감정적 분리를 경험한 게 아닌가 싶다. 더 이상 엄마에게 기대는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데 필요한 감정적 분리 말이다. 


그것조차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이번엔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상처 준 경우다. 


어느 날 해 질 무렵이었는데, 외할머니는 무엇 때문엔가 속이 많이 상하셨던 것 같다. 


엄청 화가 난 채로 엄마와 엄마 바로 위 오빠를 싸잡아 비난하면서 "너희들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희 때문에 내 인생이 꼬여버렸다"라는 식으로 말을 하더구나. 


그때 나는 멘붕이었다. 어린 마음에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느낌이었다. 좀 유식하게 표현하면, 존재감을 완전히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내가 태어난 게 잘못이었어? 나 때문에 우리 엄마가 불행하다고?"


그런 느낌이 끊임없이 엄마를 괴롭혔지. 왠지 내가 죽으면 우리 엄마가 행복해질 것 같더구나. 그리고 엄마는 죽을 결심을 했다. 


집안 창고에 가서 농약병을 찾았지. 농약 병이 몇 개 있더구나. 사실은 빈병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왜 빈병을 놔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자세히 보니 농약이 몇 방울 있는 듯했다. 


밤이 이슥해져 외할머니도 잠들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을 때. 엄마는 물 한 바가지를 떠왔다. 우리 아버지가  밭에 농약 뿌릴 때 농약을 물에 타는 걸 봤거든. 


그 바가지에 농약병을 거꾸로 뒤집어서 몇 방울 남지 않은 농약을 최대한 짜냈지.  


그 바가지를 부모님 방 앞에 놓고, 엄마는 그 앞에서 절을 했다. 마지막 하직 인사라고 생각했지.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더구나. 우리 엄마가 행복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고 나서 그 바가지 물을 마셨는데, 결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트콤 같지?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고 웃기지만, 아마도 사춘기 특유의 감수성이 그런 해프닝을 불러일으켰다고 본다.


그래도 그때는 나름 심각했단다. 농약을 어느 만큼 먹어야 죽는지 몰랐으니 진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사람은 농약 몇 방울로는 죽지 않는다는 '귀중한' 사실을 알게 됐지.




엄마가 농담처럼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외할머니 흉을 보려는 게 아니다. 


때때로 사람이란 동물이 얼마나 감정적이고 어리석을 수 있는지를 얘기하려는 것이다. 특히 사람이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는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 알고 보니 네 외할머니는 그때 외할아버지 때문에 엄청나게 속이 상해 있었다고 하더구나.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던 거지. 


엄마가 나중에 철이 들고 나서 네 외할머니에게 그런 말을 했을 때, 네 외할머니는 자신이 그때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도 하지 못하더라. 


혹시 생각나니? 


엄마가 가끔 너를 야단치고 나면, 너는 많이 우울해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꼭 하는 얘기가 있었지. 


"엄마가 하는 말을 다 믿지 마라. 특히 화가 나서 하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려 버리는 게 좋다"라고.


엄마는 이 말을 할 때마다 외할머니와 함께 엄마의 그 어리석은 행동을 떠올렸다. 


그때 엄마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대신, 네 외할머니를 껴안아 줬어야 했다. 그리고 "엄마, 사랑해"라고 말해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많이 반성한다.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지만, 우리 엄마 가슴에 큰 대못을 박을 뻔했으니 말이다. 


너는 다행히도 이 어리석은 엄마를 많이 닮지 않았더구나. 엄마가 화났을 때 너는 곧잘 "엄마, 사랑해!"라고 말하는 걸 보면. 


그리고 무엇보다 극도로 말이 없었던 나와는 달리, 너는 엄마한테 남자 친구 얘기며, 온갖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다 하는 걸 보면서 우리 엄마는 나 때문에 많이 외로웠겠다는 생각도 한다. 


우리 엄마가 늘 하던 얘기가 "어째 막내딸이라는 게 저리 말이 없어서 딸 가진 재미가 없다"는 거였거든. 


나는 우리 엄마와 달리 딸 가진 재미를 이렇게 누리고 있으니, 이게 무슨 복인가 싶다. 우리 엄마한테는 미안하고, 너한테는 참으로 고맙다. 


딸아, 


오늘도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내 딸로 태어나 줘서 정말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2024년 6월 4일,



엄마가 



#딸에게쓰는편지 #모녀관계 #외할머니 #추억 #기억 #인격 #죽음 





이전 09화 엄마가 외할머니에게서 배운 교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