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 아니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코로나 사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내 입장에선 외부의 나쁜 상황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해 주었다.
우선 딸아이 중심으로 보자면, 딸은 코로나를 계기로 양평 집을 좋아하게 됐다. 딸아이가 다니던 서울 외국인 학교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3월인가, 4월인가부터 등교 수업을 중단했다. 우리는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양평 집으로 왔다. 양평 집에서 딸아이는 줌 수업을 듣고, 나는 텃밭을 일구었다. 퀼트 전시회가 무산되면서 퀼트는 뒷전이 됐다.
대신에 상추, 비트, 치커리, 파를 심고, 고추, 가지, 고구마를 심었다. 정원에 남편이 좋아하던 백합과 수선화를 심고, 꽃잔디를 심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주고, 벌레가 생기면 벌레를 잡았다. 나날이 커가는 채소와 무스카리, 조팝나무, 벚꽃을 보면서 새 생명을 느꼈다.
생명!
내 텃밭에서는 생명이 자라고 있는데, 매일 생명이 죽어 나갔다. 생명의 소중함을 매일 느껴야 했다. 당시 법륜 스님의 법문 중에 “살아 있음에 감사하라”는 법문이 있었다. 내가 지금 고통을 느낀다면, 고통을 느낀다는 것조차 생명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살아 있는 게 다행이라는 말은 언젠가 언니가 해 준 말이기도 했다. 남편이 사망한 뒤 얼마되지 않았을 때, 나는 언니한테 원망의 말을 했다.
언니는 아들이 27세에 암으로 죽고 난 뒤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됐다. 내가 타이완에 살던 시절, 언니는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춰 연등을 달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나는 딱히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언니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어쩌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에서 해마다 언니를 통해 연등을 달았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죽고 나니 그게 억울했다. 언니한테 “해마다 연등을 달아도 소용없지 않았느냐”라고 불평을 했다. 그랬더니 언니가 “그래도 너는 살아있지 않느냐”라고 했다. 그때는 그 말조차 원망스러웠다. ‘남편이 죽었는데 내가 살아있는 게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런데 코로나를 겪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살아 있음에, 그리고 딸이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됐다. 매일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108배를 하기 시작했다.
딸아이가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우리는 개를 데리고 산책을 했다. 남편이 떠나고 양평 집 오기를 꺼렸던 딸은 이제 양평 집이 서울 집보다 좋다고 말했다. 서울 연희동에 있는 딸아이 방은 집의 구조상 반지하 상태라 어둡고 축축했지만, 양평 집 2층에 있는 딸아이 방은 밝고 큼직했다. 방에서 보는 경치도 좋았다. 우리 집에서 가장 좋은 위치였다.
매일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하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갔다. 남편이 세상을 뜬 이후에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우리는 즐기고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듣고 있던 정토회 불교대학 수업도 줌으로 바뀌었다. 불교대학을 졸업할 무렵, 내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가족을 통해 알아보는 시간이 있었다. “내 아이가 바뀌었어요”가 아니라, “엄마가 바뀌었어요” 정도 되겠다. 내가 딸아이에게 엄마가 “불교수업 듣기 전에 비해 뭐가 바뀌었어?”라고 물었더니 딸아이는 “엄마가 예전만큼 화를 내지 않아서 좋다”라고 말했다.
나는 뜨끔했다. “내가 그렇게 화를 많이 냈다고? 언제?”라고 묻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화를 참는다고 참았지만, 표정으로 화를 냈던 것 같다. 사실상 나는 남편의 죽음 직후 세상 세상 모든 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심지어 나 자신까지. 그렇게 뾰족해진 마음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옷깃을 뚫고 나오는 송곳처럼 외부로 나타났던 것 같다.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했다. 나는 왜 남편의 죽음에 이토록 집착하나 싶었다.
나는 대학 때 잠시나마 노장사장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다. 장자가 부인이 죽고 나서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했다’는 대목에서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죽음이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죽음은 곧 자연의 변화 원리에 따르는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특별히 서러울 것도, 애통해할 것도 없다고 여겼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할 수만 있으면 나도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사상을 깊이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10여 년 사이에 아버지, 엄마, 큰오빠, 이모의 죽음을 겪으면서도 나는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죽음에 크게 울지도 않고 너무 담담해서인지 주변에선 “어떻게 막내딸이 저렇게 무심하냐”는 뒷말까지 할 정도였다.
그랬던 내가 남편의 죽음 앞에 무너져가는 모습이 나 역시 생소했다. 솔직히 나도 내가 그렇게 많이 울게 될 줄은 몰랐다.
배우자의 죽음은 스트레스 지수가 100으로, 질병(53) 감옥수감(63) 이혼(73) 등에 비해 최고점이라는 객관적인 조사 결과(미국 워싱턴대 토머스 홈스교수팀)는 최근에 봤다. 특히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닌 ‘갑작스러운 사별’은 남은 배우자의 정신적인 죽음을 경험한다는 얘기도 최근에 들었다.
남편의 사망 이후에 나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봤다. 이 드라마에서 한 의사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암은 어떤 면에서 축복받은 병이야. 마지막 정리를 할 수 있고,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거든.”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비슷한 내용이었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마지막 인사. 나는 여기에 포인트가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은 남은 가족에게 더 큰 충격과 아픔을 남기는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죽음 뒤에 남겨진 가족은 그 충격과 슬픔을 죽음 이후부터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기에. 어쩌면 그게 한이 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불교대학이 끝나고 나서 바로 경전반 공부로 이어졌다. 본격적인 불교 교리 공부가 시작됐다. 반야심경, 금강경, 그리고 법구경 등 잘 알려진 경전을 공부하면서 나는 내려놓는 연습을 했다. 집착을 끊고, 기대를 내려놓고, 스스로 강해지기를 희망했다. 무엇보다 지혜롭게 살고 싶었다. 남편이 죽기 전까지 나는 지혜롭게 살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그 지혜는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도대체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걸까.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법문을 떠올렸다. 내 집착과 과도한 슬픔이 바로 두 번째 화살이었다. 그런 자잘한 깨달음과 더불어 108배를 하는 동안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도 했다.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관점 바꾸기 첫 번째 단계에서 나는 나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뒤집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국에 온 것, 한국에서 집을 지은 것, 그것도 양평에 집을 지은 것을 모두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한국에 오지 않고 타국에서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면 나는 어떻게 견뎠을까, 한국에 집을 짓지 않았다면 남편이 잠시나마 그렇게 행복할 수 있었을까? 나는 남편이 행복했다고 믿었다. 그것조차 그의 운명이자 내 운명이라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는 나름대로 마음의 평화를 찾았지만, 딸아이는 뒤늦게 남편의 죽음이 가져온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결국 코로나가 가져온 우리의 평화는 태풍 속의 눈이었다.
딸아이는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며 자신감을 잃었고, 당시 개점휴업 상태였던 우리의 상속 관련 소송은 코로나가 끝날 무렵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