퀼트는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타이완에서 우연히 시작한 취미였다. 딸아이 또래 여자아이를 둔 젊은 엄마가 바느질 한번 배워보자고 권유한 게 시작이었다. 마침 당시 우리 집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에 신광 미츠코시 백화점이 있었다. 그 백화점 2층 브라더 미싱 숍에서 재봉틀 바느질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바느질 강의가 평범한 바느질 강의가 아니라, 퀼트 강의라는 것은 배우면서 알았다. 머신퀼트였다. 재봉틀로 하는 퀼트. 손으로 하는 퀼트에 비해 속도감이 있어서 좋았다. 나는 딱히 활동적인 성품은 아니지만, 의외로 가만히 앉아서 꼬물꼬물 하는 손작업을 잘 못하는 성향도 갖고 있었다. 마늘을 까거나 파를 다듬는 것 등 앉아서 하는 모든 집안일들도 무지 싫어했다. 그러니 손퀼트였다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처음에는 가방 만들기부터 시작했다. 가방은 내가 좋아하는 패션 소품이기도 했기에 재미있었다. 가방뿐만 아니라 아이 옷과 쿠션 등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만들 때마다 성취감을 느꼈다.
퀼트를 하면서 내가 성취감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도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생활은 편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만 축내는 식충이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집안일이라는 게 사실 끝도 없고 표도 나지 않는 것이기에,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으니 무력감이 들기도 했다. 간혹 블로그에 글도 쓰고, 주식 거래도 했지만, 그 무력감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아마도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퀼트는 그 무력감 대신 성취감을 주기에 충분한 취미였다. 몇 년 만에 가방, 파우치, 테이블러너, 쿠션 등 온갖 작품(?)을 만들어 판매행사를 하고, 바느질에 관심 있는 한국 엄마들 대여섯 명을 모아 퀼트를 가르치기도 했다. 매주 한번 퀼트모임을 하고 각자가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눠 먹는 재미는 일상에 활력을 줬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재미있게 인생을 산 시절이기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간적, 경제적 부담 없이 하면서 정도 나누었다는 점에서다.
한국에 오고 나서는 정착하기에 바빠 잠시 접었다. 2016년부터 다시 머신 퀼트를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타이완에서는 언어의 한계 때문에 고급과정까지 배우지는 못했다. 한국에서 함께 배운 사람들과 퀼트 모임을 하면서, 퀼트 전시회를 해보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남편도 적극 찬성했다. 남편은 내 손을 보고 ‘Artistic’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손가락이 길고, 대화 중에 손가락 모션을 잘 취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니 손을 쓰는 뭔가를 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작품을 하나씩 만들 때마다 “이번 작품이 최고야!”라는 환호성을 질렀다. 매번 그랬기에 크게 신뢰하진 않았지만, 응원받는 느낌은 좋았다.
남편이 살아생전에 한 마지막 작품은 우리 정원을 새로운 기법의 퀼트로 표현한 것이었다. 사실 이 작품은 딱히 완성도가 높은 것이 아니었는데도, 단지 '우리 정원'이라는 이유로 남편은 엄지 척을 해주었다.
퀼트로 표현한 정원 실제의 우리 정원
그렇게 10년 가까이해 온 퀼트였지만, 남편이 사망하고 난 뒤에는 모든 것에서 손을 놓고 있었다. 그 무력감을 퀼트로 다시 채우고 싶었다. 마침 내가 속한 퀼트 동호회에서 퀼트 전시회를 준비 중이었다. 남편이 사망할 무렵에 계획된 전시였지만, 나는 참가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엄두가 안 나서였다. 한동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전시회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이 적극 지지했던 그 일을 하다 보면 다시 성취감이 살아날 것 같았다. 어떤 주제로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나는 남편과 관련 있는 어떤 주제를 정하고 싶었지만,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하나의 노래를 듣게 됐다. '내 영혼 바람 되어'라는 노래였다. 영어 원제가 'A Thousand Wind'라 '천 개의 바람 되어'로 번역되는 노래. 그 노래의 가사가 구구절절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곳에서 울지 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그곳에서 슬퍼 마오.
나 거기 없소.
그 자리에 잠든 게 아니라오.
나는 천의 바람이 되어,
찬란히 빛나는 눈빛 되어,
곡식 영그는 햇빛 되어,
하늘 한 가을비 되어
그대 아침 고요히 깨나면
새가 되어 날아올라
밤이 되면 저 하늘 별빛 되어
부드럽게 빛난다오.
그곳에서 울지 마오.
나 거기 없소.
이 세상을 떠난 게 아니라오.
알고 보니 이 노래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불리던 노래였다. 세월호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이 노래를 듣고 위안을 받았을까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 노래 가사를 들으면서 위안을 받았다. 마치 남편이 나에게 속삭이는 말처럼 들렸다.
살다 보면 어떤 우연 같은 필연이 우리 인생을 지배한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나는 이때 이 노래가 그랬다. 나는 49재 이후로 내 곁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남편의 영혼이 여전히 내 곁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이 노래 덕분에 나는 퀼트의 주제를 ‘천 개의 바람 되어’로 정했다. ‘바람’을 ‘바람개비’로 변형시켜 남편의 이니셜 ‘K’를 표현한 퀼트였다.(커버사진 참조) 바람개비 천 개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건 역부족이었다.
그 한여름 몇 개월 동안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작품을 만들었다. 머신 퀼트는 가만히 앉아서 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정확한 재단과 자르기, 다리기, 연결하기의 반복작업이었다. 블록을 하나씩 연결하고 다림질하는 과정이 마치 상처를 꿰매고 아물게 하는 과정 같다는 느낌도 종종 받았다. 꼭짓점이나 색상 조화가 안 맞으면 다시 뜯어서 해야 했다. 마치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마지막 퀼팅 작업이 퀼트의 백미였다. 원하는 모양대로 조각을 이어 붙인 다음, 퀼팅솜과 뒷감을 덧대서 하는 작업. 이 퀼팅 라인이 잘못되면 아무리 멋진 패치워크도 빛을 보기 힘들었다. 나는 일부만 뜯어서 다시 했던 것 같다. 이 작업 중에 남편과의 추억도 되살아났다.
언젠가 크리스마스 때 나는 시누이에게 줄 선물로 별모양 테이블 러너를 만들었다. 그런데 마지막 테두리 퀼팅을 다 끝내고 보니 일부 라인이 삐뚤어져 있었다. 난감했다. 재봉틀로 한 퀼팅이라 뜯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퀼팅을 뜯어 내느니 다시 만드는 게 낫다고 할 정도로 꺼리는 부분이었다. 나는 그걸 남편에게 보여주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걸 어떡하냐고, 다시 만들 시간도 없으니 그냥 삐뚤어진 채로 시누이에게 보내야겠다는 말까지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시누이에게 선물한 별모양 테이블 러너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나는 그 잘못된 퀼팅라인이 전부 제거돼 있는 걸 발견했다. 남편이 밤새워 죄다 뜯어낸 것이었다. 감동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남편의 사랑을 하나의 구체적 행동으로 떠올릴 때 늘 이 장면이 빠지지 않았다. 물론 삐뚤어진 것을 그냥 보고 넘어가지 못하는 남편의 성향도 한몫했지 싶다.
그렇게 추억을 불러오다 보니, 퀼트 작업을 하는 3~4개월 동안 내 얼굴에는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천 개의 바람 되어’라는 제목의 작품이 전시되는 동안 나는 뿌듯했다. 당연히 성취감도 느꼈다. 무엇보다 그 작품은 남편과의 공동 작품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후에도 두세 번 정도 더 공동 전시회에 참석했다. 어쩌면 취미로 시작한 퀼트가 취미 이상의 생업이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들었다.
1997년에 개봉됐던 영화 <아메리칸 퀼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라. 행복과 고통은 다른 세세한 사건들과 섞여 들어 정교한 무늬를 이루고, 시련도 그 무늬를 더해 주는 재료가 된다. 그리하여 최후가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 무늬의 완성을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씩 조각을 잇는 퀼트의 과정 자체가 자잘한 경험과 사건이 모여 이루어지는 우리 인생과 닮아 있다. 그런 의미부여를 하면서 나는 퀼트로 제2의 인생을 가꾸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코로나를 겪으면서 뒤바뀌어 버렸다. 운명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