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남편의 죽음에 알 수 없는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딸을 보기가 미안할 때가 많았다. 마치 딸이 ‘아빠 죽음은 엄마 탓’이라고 할까 봐 두려워하기도 했다.
어느 날 딸아이 친구의 엄마가 나를 학교 연극에 초대했다. 딸아이가 중요한 배역을 맡았다고 했다. 딸아이가 연극을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부모가 가서 볼 수 있는지는 몰랐다. 게다가 딸아이는 나를 초대하지도 않았다.
학교 소극장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만장 같은 깃발을 들고 둥그렇게 둘러싼 무대 가운데에서 세 사람이 얘기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왔다. 그중의 한 명이 딸아이였다. 여자로 분장한 다른 한 명이 가슴을 치면서 울고 있었다. 영혼으로 보이는 남자가 옆에 서 있었다. 그 남자가 여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 탓이 아니야. 내가 건강 관리를 잘 못한 탓이야. 제발 울지 마!”
그리고는 무대 주변을 둘러싼 아이들이 계속 게송처럼 “당신 탓이 아니야!” “당신 탓이 아니야!”를 읊조렸다. 다른 대화도 많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고, 이 대사만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무대의 아이들도 관객들도 눈물바다가 됐다.
나는 처음에 어리둥절했다. 이게 무슨 내용인가 싶었다. 나중에 딸아이 친구 엄마가 설명했다. 우리 딸이 아빠의 죽음을 소재로 극을 만든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저 영혼은 남편이고, 무대 가운데에서 울고 있는 여자는 나였던 셈이다. 딸아이는 무대에서도 딸의 역할이었다.
딸아이는 나중에 내가 너무 울까 봐 초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딸아이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학교 연극 활동에서 재미를 찾는 듯했다. 이때의 연극은 심리극 전문가가 진행하는 일종의 국제 학교 창작극 페스티벌이었다. 여러 나라 국제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딸아이가 낸 ‘망자의 말’이라는 아이디어가 채택됐던 것이다.
딸아이 우려대로 나는 그 연극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울면서 뛰쳐나왔지만, 딸의 마음이 절절이 다가왔다. 내가 스스로의 죄책감에 빠져 딸의 마음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참 못난 에미였다.
딸아이 역시 이 연극을 통해 아빠의 죽음을 직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친한 친구들 외에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던 아빠의 죽음과 우리 가족의 상황을 얘기하는 과정에서 딸아이도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딸아이와 나는 이 연극을 계기로 남편에 대해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딸이 기억하는 아빠,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남편의 얘기를. 우리는 딱히 누구랄 것도 없이 그동안 남편의 얘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슬픔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남편과의 마지막 여행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는 남편 사망 2주 전에 갔던 필리핀 팔라완 섬이었다. 상당히 고급이었던 리조트에서 4박 5일을 묵고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면서 남편이 말했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어!”
남편의 이 뜬금없는 말에 나는 그냥 피식 웃었지만 속으로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이 말이 혹시 ‘내가 내 인생에서 한 선택중 가장 잘한 것이 당신과 결혼한 거야’라는 말로 바꿀 수 있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결혼을 결심하면서 한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기에, 그 말을 나는 결혼 생활의 성공 척도로 삼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말하자면 나는 남편의 인정을 받는 것이 나는 그만큼 중요했다.
하지만 이 말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던 것은 남편이 당시에 심각한 치매 증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혹시 저 말조차 남편이 나중에 기억할까라는 생각도 동시에 하면서 씁쓸한 기분이었다.
내가 이 얘기를 했을 때, 딸아이는 이 장면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딸아이의 기억에는 남편이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그리고 한나도 내 딸로 다시 만나고 싶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딸아이는 이때 ‘어, 아빠가 이상하다. 곧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느낌을 가졌다고도 덧붙였다. 이 말은 내가 “너는 왜 양평 병원에서 아빠가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울지 않았어”라고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남편과 나, 그리고 딸아이는 한 줄에 꿰인 물고기처럼, 어떤 운명의 사슬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연한 사실인데, 그 당연한 사실조차 갑자기 깊이 깨달아지는 순간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단순한 모녀 관계를 넘어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동지이자 친구처럼 변해갔다. 그리고 딸은 어느새 내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나는 딸을 내가 돌봐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지 버팀목이 되어주리란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딸은 내 기대이상으로 부쩍 자라 이미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딸에 비해 나는 여전히 부족한 엄마였다. 마치 걷는 것을 잊어버린 아이처럼, 일어서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내가 버팀목이 되어야 하지만,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늘 미안했다. 딸이 나를 못난 엄마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만큼 나는 자존감이 낮았다.
사실상 내 자존감의 대부분은 남편으로 인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에 대한 남편의 평가는 상당히 후했다. 농담으로도 나를 깎아내리는 말은 하지 않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내 외모에 대해서도 남편은 “내 눈에는 당신이 가장 예뻐”라는 말을 자주 했다. 물론 나는 그걸 처음부터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랬다고 여겼다.
그런데 미에 대한 남편의 기준이 달라서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됐다.
타이완에서 만난 엄마 중에 김태희에 버금갈 정도로 예쁜 일본인 엄마가 있었다. 이름이 유리였다. 유리가 어느 날 자신의 일본인 친구와 함께 우리 집을 방문해서 남편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유리의 그 일본인 친구는 그냥 평범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나중에 남편에게 “유리 이쁘지?”라고 했더니, 남편은 “글쎄, 유리보다는 그 친구가 더 예쁘던데!”라고 되받았다. 남편은 미의 기준이 다른 사람이었다. 외모를 넘어 뭔가 다른 것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게 영혼이었을까, 본성이었을까? 그렇다면 나를 예쁘다고 한 남편의 말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단순한 콩깍지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제 눈에 안경이니, 나는 남편 눈에 잘 맞는 안경이었던 셈이다.
한국에 온 이후 딸아이와 내가 다투던 시절에도 남편은 곧잘 내 편을 들었다. 어느 날 엄마에 대해 불평하는 딸에게 남편이 해 준 말은 지금 생각해도 감동이었다.
“엄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야!”
그래, 괜찮은 사람. 나는 비록 모두에게 괜찮은 사람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남편이 생각하는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믿고 싶었다. 나는 결혼 전까지 자존감이 그렇게 높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편과 결혼 생활을 하는 내내 이런 말을 들어서였던지, 자존감이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어쩌면 내 자존감의 원천에 남편이 있었기에 남편이 세상을 뜨는 순간 내 자존감도 무너져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마치 추락하는 새처럼!
그 자존감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랑이라는 게 그런 거라고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 나는 그동안 남편에게 괜찮은 사람이었다면 이제 딸을 위해서라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어쩌면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등불이 되는 삶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침 딸아이의 심리극을 보고 울면서 뛰쳐나오는 나에게 다른 학부모가 해 준 말이 생각났다. 호주 출신인 그 엄마는 내게 “너는 용감한 사람이야”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때는 이렇게 쪼잔해 빠진 나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까 싶었다. 나중에 장영희 교수의 <내 생애 단 한 번>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랑받는 자는 용감하다. 사랑받은 기억만으로도 용감할 수 있다”
그렇구나. 내가 용감할 수 있구나, 아니 용감해야 되겠구나 싶었다. 시누이가 장례식 마치고 독일로 떠나기 직전에 해준 말도 떠올랐다. “너는 강한 사람이야”라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