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곧바로 정토회 불교대학에 등록하고 싶었지만, 시작 시점에 여유가 있어서 잠시 보류했다.
그즈음 딸아이와 나는 약간의 변화를 겪었다. 우선 둘 뿐인 집에 식구 하나를 추가했다. 골든레트리버 개 한 마리였다.
개는 참 이상한 동물이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몽글몽글하게 해 주는 존재. 그 개가 우리 집에 오던 날, 딸아이와 나는 웃음을 되찾았다. 개 이름은 ‘하니’로 지었다. 딸아이가 자신의 이름 한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지만, 남편을 ‘하니(Honey)’로 불렀던 나에게는 의미 깊은 이름이었다. 하니를 부를 때마다 남편의 따뜻함도 동시에 떠올렸으니.
나는 미혼 시절에도 개를 키웠다. 30대 중반의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와서 가만히 있는데, 집안에 시계소리만 들렸다. 생명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다는 점이 그렇게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시추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이름이 뭉치였다. 메마르고 삭막했던 내 마음에 ‘사랑’이란 감정을 일깨워준 최초의 동물이 어쩌면 뭉치였는지도 모르겠다. 뭉치는 결혼 후에도 마치 자식처럼 우리와 함께 살았다.
한국에 다시 왔을 때도 개를 키우고 싶었지만, 서울 집은 세 들어 사는 집이라 미뤘다. 딸아이가 졸업하고, 양평집으로 완전히 입주하면 골든레트리버 한 마리 키우자고 남편과 약속을 해놓고 있었다. 좀 갑작스럽긴 했지만 하니를 데려오고 나서 내 생활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하니와 함께 밖에 나가 산책을 하면서 우울한 기분을 떨쳐냈다.
하니는 서걱대던 딸아이와 내 감정을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우리는 하니를 보면서 말수를 늘려가고 웃는 날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상속 문제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미국 가족과 연락이 쉽지 않아 우리는 한국 재산과 미국 재산의 추정분 만으로 상속재산 신고를 하고 상속세를 납부했다. 사망 6개월 안에 상속세 신고를 해야 한다는 상속세법에 따른 것이었다.
상속세 신고가 끝난 뒤 미국 가족들과 연락이 닿았다. 그런데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남편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고, 남편에게 생명보험이 있는지부터 물었다. 이 질문에 깜짝 놀랐다. 다행히 없었다. 보험을 극도로 싫어했던 남편이 고마울 정도였다.
세법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가 처음에 따른 상속세법은 한국이 아닌 독일법이었다. 남편이 독일인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은 EU 준거법에 따라 한국 세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인이 생전에 살았던 곳의 세법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변호사도 뒤늦게 그 부분을 수긍했다.
한국 상속법을 따르면 아내의 지분이 줄어들어 나에게 불리하긴 했지만, 변호사가 수긍하는 것을 나 역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법대로' 하면 뭐든지 잘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 변호사는 왜 그걸 미리 몰랐을까라는 의문은 들었다.
우리가 한국 세법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상속문제 합의를 서둘렀지만, 십여 차례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합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남편의 미국 가족은 2019년 6월 ‘상속재산분할 청구소송’을 한국 가정법원에 제기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측 변호사는 우리에게 불리할 게 없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믿었고, 그 소송이 2024년인 올해까지 계속되리라고는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그 소송 자체보다 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소송 청구서에 실린 남편과 전처의 이혼 사유였다. 내가 그 이혼의 주범(?)이라는 내용이었다. 충격이었다. 상속재산 분할 청구서에 왜 이혼사유가 실렸는지 그 당시로선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시누이가 장례식이 끝난 직후에 예견했던 대로, 그들이 상속재산 분할에 호락호락 합의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상황에서 정토회 불교대학에 입학했다.
교육 장소는 홍제역 근처에 있는 작은 법당이었다. 10여 명의 도반들이 매주 한번 법륜 스님의 법문을 영상으로 듣고, 마지막에 둘러앉아 소감을 나누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6개월 동안 불교의 역사나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교육이 있었지만, 나에게 다가온 것은 일종의 생활 법문이었다. 나는 많은 법문을 들었지만 법문 하나하나를 기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법문을 계속 들으면서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 즉 관점을 바꾸는 훈련을 했던 것 같다.
법륜 스님의 법문은 집착과 기대, 욕심을 내려놓고 지혜롭게 살기를 바라는 내용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이 ‘관점 바꾸기’는 내가 내 문제의 본질을 보는 데 상당히 도움을 줬다.
나는 우리에게 좋다고 생각했던 일이 결국 좋은 일이었을까부터 시작했다.
하루는 법륜 스님이 남편을 잃은 어떤 아내 얘기를 했다. 살갑고 다정한 남편이었다.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그 아내는 남편이 그리워서 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한 내용이었다. 법륜 스님은 만약 그 남편이 술도 마시고, 바람도 피우고, 말썽만 부렸다면 아내 입장에서 남편의 죽음이 그렇게 원통하겠느냐고 말했다. 오히려 좋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결국 우리가 좋다고 생각한 일이 상황에 따라 조금만 관점을 달리하면 오히려 불리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마치 내 얘기 같았다. 평범한 얘기였지만, 내 상황을 뒤집어 생각해 보기에는 충분한 내용이었다.
우선 우리가 한국에 와서 정착한 일, 한국에 땅을 사고 집을 지은 일, 그 집을 내 이름으로 한 일… 그 모든 일들이 과연 좋기만 한 일이었을까. 아닌 것 같았다.
그 당시에 나는 끝없이 우리가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남편이 갑자기 그렇게 죽었을까라는 후회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게다가 양평에 집을 짓지 않았다면 양평에 머물지도 않았을 테고, 만약에 서울에 머물렀다면 행여 그런 일이 생겼더라도 금방 병원에 가서 살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서울 연희동 집은 119 구조센터에서 100미터 거리였고,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이 바로 지척에 있는 위치였다.
남편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내가 누렸던 각종 메리트들도 상속 문제를 처리하면서 불리하게 작용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에서 전부 내 명의를 이용했다. 차와 모든 생활비도 내 계좌에서 나갔다. 남편이 한국 거주권이 없는 외국인이고(집을 지을 당시에는 없었다), 내가 한국인이기에, 편의상 그랬던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이 ‘증여’로 처리되면서 부인에게 주어지는 상속세 혜택(30억 원)을 전혀 받지 못했다. 이 역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특히 집의 경우 상속으로 처리했을 경우, 상속받을 당시 가격으로 상속에 포함되지만, 증여로 처리했기에 엄청난 가산세까지 부담해야 했다.
처음의 뒤집기는 이처럼 ‘좋은 게 좋은 게 아니었다’고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쁜 게 나쁘기만 할까’로 발전했다. ‘좋다, 나쁘다’라는 감정조차 주관적인 것이어서, 딱히 그렇게 판단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관점을 바꾸고 나니 새롭게 보이는 게 많았다. 무엇보다 나는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법문을 듣고 나서 나누는 소감 나누기를 통해 깨닫는 부분도 많았다.
나는 처음 한두 달은 소감을 제대로 나눌 수가 없었다. 말을 꺼내기만 하면 눈물이 나와서였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사연들이 다양했다. 직장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 사춘기 자녀 때문에 온 사람, 남편과의 갈등으로 온 사람 등 언뜻 보면 가벼워 보였지만 모두 저마다의 고통 속에 있었다.
처음에는 내 고통이 제일 크다고 생각했지만, 오만이었다. 사람마다 짊어져야 할 고통의 무게가 다를 뿐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사연을 얘기하면서 같이 울었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먼저 간 남편 얘기를 꺼냈지만, 결국 울 수밖에 없었다. 이상했다. 같이 눈물을 흘려줄 사람이 있다는 게 이렇게 위안이 되나 싶었다.
나는 어릴 때의 깊은 상처 이후로 늘 ‘혼자’라고 생각했고,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어느 순간부터 ‘혼자여야 한다’ ‘달라야 한다’라는 오만과 아집으로 바뀌어 있음을 몰랐다. 그래서 내 문제를 남에게 털어놓은 적도, 도움을 구해본 적도 없이 오롯이 혼자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내 슬픔조차 혼자만의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게 아니었다. 사실상 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살고 있었지만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불교 공부를 통해 세상과 다시 연결되고 있음을 느꼈다. 어두운 방 안에웅크리고 있다가 드디어 세상을 향해 문을 열었다는 느낌도 들었다.
<작가의 변명>
이번 회를 쓰다가 잘 써지지 않아서 결국 한 회를 쉬었습니다. 글쓰기에 정체기가 온 탓도 있지만, 보다 큰 이유가 아마도 소송과 상속세법인 것 같습니다. 상속 문제만 나오면 제 머리가 안드로메다로 가더군요. 헷갈리고 골치 아프고, 몽롱해집니다. 이걸 빼버릴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이 부분이 없으면 나중에 퍼즐이 안 맞을 것 같기도 해서 일단 부분적으로 써 보긴 했습니다. 여전히 해결된 상태가 아니라서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ㅠㅠ
오늘부터 연재 시간을 매주 화, 금 저녁 8시에서 낮 12시로 바꿉니다. 요일은 같고, 포스팅 시간만 바꾸었습니다. 큰 의미는 없지만 약간의 변화를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