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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11시간전

22. 딸아이의 꿈과 좌절

졸업식과 대학 입학


“엄마, 나는 아무래도 대학 가기 힘들 것 같아.”


딸아이의 이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기가 막혔다. 아니 그렇게 똑똑했던 내 딸은 어디로 갔나 싶었다. 아이가 완전히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있다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나는 참 둔한 엄마였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 딸은 공부를 꽤 잘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남편이 좋아하는 과학 쪽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외국인 학교는 1년에 두 번씩 과목별로 학부모 면담을 했다. 그럴 때마다 과학 선생님은 자신이 10여 년 과학을 가르쳤지만, 우리 딸만큼 뛰어나고 성실한 아이는 보지 못했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남편은 마치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아이가 과학을 배우기 시작했던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딸에게 과학 및 수학을 가르쳤다. 남편은 아이가 과학도가 되기를 원했다. 과학도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기대가 컸다.


그 영향이었는지 아이는 한동안 뇌과학자가 되겠다고 했다. 남편이 죽기 직전 나타난 치매 증상 때문에 그 꿈이 강해졌다. 하지만 그 꿈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직후에 포기해야 했다. 수학 성적이 급속도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영어로 수업하는 수학 과외교사를 잠시 붙여주기도 했지만, 아이는 수업 방식에 만족하지 못했다. 아빠처럼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남편은 아이가 이해할 때까지 수십 번을 반복해서 설명해 준 맞춤 가정교사였던 셈이었다.


어느 날 아이가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학교 카운슬러가 이런 수학 성적으로는 뇌과학 관련 학과에 가기 힘들다고 말했다고 했다. 아이는 “아빠를 실망시켜서 어떡하냐”며 흐느꼈다.    


아이는 남편이 세상을 뜬 직후 “내 영웅이 세상을 떠났다”라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 정도로 아빠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남편은 단순히 공부를 가르쳐 준 것을 떠나 끊임없이 아이를 격려하고 칭찬했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이가 시험공부하는 날이면 남편 역시 밤늦게까지 아이 옆에 붙어 있었다.


그런 아빠의 부재를 나는 메워주지 못했다. 나는 아이가 잘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내 격려가 없어도 아이는 잘할 거라고 믿었다. 내가 무심했던 그 사이에 아이는 단순한 성적 부진을 넘어 자신감도, 자존감도 깡그리 무너져 버렸다는 것을 몰랐다.




2020년 가을에 딸아이는 대학 원서를 써야 했다. 외국인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에 미국이나 유럽 쪽 대학으로 진학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 대학에는 지원 자격이 되지 않았다. 외국인 학교는 우리나라 교육부가 정한 정규 교육과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 대학에 지원하기 위해선 결국 중고교 자격 검정고시를 거쳐야 하는 데, 딸아이는 그 정도 한국어 실력은 되지 않았다.


그러니 대부분의 외국인 학교 학생들은, 비록 한국인이라도 외국에 있는 대학교에 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우리 역시 아빠가 외국인이고, 딸아이 어릴 때부터 외국에 살았기에 외국으로 대학을 보내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원서를 써야 할 시기에 딸아이는 원서를 쓰지 않았다. 처음엔 어디로 가서 무엇을 공부할지를 고민했다. 딸아이는 뮤지컬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딸아이는 어릴 때부터 연극과 뮤지컬을 유독 좋아했다. 학교에서 하는 연극이나 뮤지컬에 꼬박꼬박 참가했다. 그러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빠져들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뮤지컬을 하는 동안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라고 말할 정도로 좋아하고 즐겼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인 2019년에는 뮤지컬 ‘레미레라블’에 ‘코제트’ 역으로 출연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원래의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코제트는 그저 장발장의 양녀로 크게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2012년에 개봉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선 코제트의 비중이 컸다.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코제트 역으로, 휴잭맨(장발장), 러셀 크로우(자베르), 앤 해서웨이(팡틴) 등과 함께 출연했다.


학교에서 만든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도 코제트의 비중이 커서 주인공 급이었다. 뮤지컬이 끝나고 학부모와 교사들이 딸아이의 노래와 연기를 칭찬하면서 “뮤지컬을 전문적으로 해보라”라고 권했다. 그렇게 딸아이는 뮤지컬 배우의 꿈을 키웠다. 이후에도 딸은 꽤 여러 번 주인공으로 학교 연극에 참가했다. 아이는 빛났다.





그런 뮤지컬이었기에 딸아이가 뮤지컬 공부를 하는 것을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어디로 가느냐였다. 어느 나라, 어느 대학으로 가서 뮤지컬을 공부해야 할까.


딸아이는 처음에 미국을 꼽았다. 뉴욕대학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미국은 남편이 꺼린 나라였다. 아이의 장래에 대해 남편과 많은 얘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 보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자주 했다. “돈을 벌기엔 좋은 나라지만, 오래 살 나라는 아니다”라는 게 미국에 대한 남편의 인식이었다.


이런 남편의 생각을 에둘러 전하면서, 아이에게 미국 외에 다른 나라를 택하기를 바랐다. 상속재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돈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돈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딸아이는 차선으로 영국을 택했다. 영국에 있는 10여 개의 액팅스쿨 리스트를 작성해 입학 관계자와 화상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별로 해 줄 일이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외국 대학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지만, 액팅스쿨에 대해서는 더더욱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영국도 가기 싫다고 했다. 우중충한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학을 가는 것 자체에 회의감을 보였다. 자신은 아무 대학에도 못 갈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이런 예술 계통 대학은 전부 학부모가 학원이나 입시 전문가와 연계해서 준비해 준다는 것을. 나는 모든 것을 아이에게 맡겨 버리고 있었으니, 아이가 멘붕이 올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아이의 상태를 알고 나서 미안했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처음에는 화를 냈다. “네가 얼마나 똑똑한 아이였는지 잊었냐”라고 야단쳤다. 아이는 눈물만 뚝뚝 흘렸다. 의욕부진, 존재가치 상실 등 우울증 증세도 보였다.


잘못하다간 아이마저 잃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이에게 뭘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봤다. 공부를 잘하는 것? 좋은 대학에 가서 이름을 날리는 것?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이가 행복하길 바랐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엔 집착과 기대를 많이 내려놓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여기던 시점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딸에게 “대학에 가기 싫으면 안 가도 좋다”라고 말했다. 아빠의 기대는 잊어버리라고 했다. “아빠가 원하는 것도 네 행복일 거야!” 더불어 “대학 갈 돈으로 여행이나 하자”고 했다. 그냥 해 본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렇게 사는 삶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말이 아이 마음을 편하게 해 줬는지, 아이는 그 얼마 후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 대학은 이미 접수가 끝났다. 아이는 미국 대학 입학 신청에 필요한 SAT조차 치지 않았다. 대신에 아이는 졸업하던 해 IGCSE 시험을 쳤다. 주로 영국 대학에서 필요로 하는 중등교육자격시험이었다. 이 시험에서 아이는 좋은 성적을 냈다며 좋아했다.


대학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에서 학생들이 부모에게 한 마디씩 감사를 표하는 순서가 있었다. 이때 아이는 하늘을 쳐다보며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 역시 감정이 복받쳐 그 장면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졸업식이 끝나고도 딸아이는 30분 동안이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들이랑 즐겁게 웃으면서 사진을 찍는데, 도대체 우리 딸은 어디 있나 싶었다. 나중에 딸아이가 눈이 벌게진 채로 나왔다. 아빠 생각에 교실에 가서 울었다고 했다.


딸아이가 졸업식에서 한 말을 나중에 들려줬다. “18년 동안 키워준 엄마와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는 아빠에게 감사한다”는 말이었다.


딸아이는 다른 친구들이 학교에 입학해 다니고 있을 즈음인 2021년 가을, 시드니대학교 심리학과에 합격했다. 전액은 아니지만, 장학금도 일부 받았다.


2022년 2월부터 시작하는 새 학기에 맞춰 나는 딸과 함께 시드니로 날아갔다.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이런저런 생활용품을 장만하는 동안 우리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그 2022년에 우리에게 최악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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