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종합선물세트를 받아본 적은 없다. 하지만,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 때 큰 맘먹고 조카에게 과자 종합선물세트를 사 준 적은 있다. 온갖 종류의 과자가 들어있던 종합선물세트. 조카들은 쿠키며 사탕이며 이런저런 과자를 골라 먹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양한 행운이 겹겹이 쌓인 것을 '행운종합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행운 종합선물세트가 있다면 '불운 종합선물세트'도 있을 것 같다. 온갖 불운이 세트를 이뤄서 몰아닥치는 경험. 우리에게는 2022년이 딱 그랬다.
시작은 딸아이의 코로나였다. 희망에 부풀어 새 학기를 시작한 딸아이가 2주 후쯤에 전화를 걸어왔다. 코로나 양성반응이 나왔다고 했다. 나 역시 호주에서 돌아오고 1주일 격리 후에 받은 코로나 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기침도 두통도 없는 무증상 코로나였다. 집에서 격리만 했다.
딸아이는 달랐다. 일단 기숙사를 떠나 학교에서 준비한 코로나 격리 장소로 가야 했다. 늘 감기가 목으로 오던 아이라 침도 삼키기 힘들 정도로 많이 아팠다고 했다. 친척도 친구도 없는 그곳에서 딸아이는 혼자서 코로나와 싸우고 또 외로움과 싸웠다. 있다고 해도 면회가 안 됐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징징거리는 아이 전화를 받아주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호주 정부에서 나온 식비 지원 바우처로 아이는 음식을 주문해서 먹을 수 있었다. 연극을 함께 했던 아이 친구의 외삼촌이 마침 호주에서 살고 있어 도움을 요청했다. 그 외삼촌이 약과 과자류를 가져다줬다고 했다.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이의 코로나 격리는 2주 만에 끝났다.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것이기에 그걸 특별한 불행으로 포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낯선 환경에서 새 학기 시작과 동시에 엄마도 없이 겪은 일이라 가슴은 아팠다.
6월 말쯤 딸아이가 집으로 왔다. 호주 대학의 겨울 방학이었다. 딸아이는 한국에서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맛있는 것도 먹고 여행도 다니고 운전도 배우고, 댄스 학원에도 다니고 싶어 했다. 나 역시 다 해주고 싶었다. 호주에 가자마자 코로나에 걸려 힘들고 외로웠던 딸아이에게 보상해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내 통장에서 돈을 빼낼 수가 없었다. 내가 가진 모든 계좌에 압류가 걸려 있었다. 압류 주체는 국세청이었다. 이유는 상속세를 ‘전부’ 내지 않아서였다.
사실 2021년에 우리는 엄청난 상속세 통고를 받았다. 상속세 22억. 우리나라 상속세는 상속금이 50억 원이 넘으면 50% 세율이 적용되는데, 당초 우리 변호사들의 계산에선 이 50%가 적용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나는 최초 신고 기준으로 이미 6억여 원의 상속 및 증여세를 분할납부 방식으로 납부해 오고 있던 참이었다. 그것도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코로나 기간에 국세청이 미국 세무서와 협조아래 미국에 있는 돈까지 합하니 결국 50% 세율적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남편 사망 후 3년이 지났으니 엄청난 가산금도 붙어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미국 세무서와의 협조가 원활하지 않아 조사가 늦어졌는데도, 가산금은 그대로 적용됐다.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 상속세는 전체 상속금 기준으로 상속세가 통으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상속세는 1순위 상속자가 전부 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1순위 상속자가 나, 2순위가 딸이었다.
우리는 2021년에 있는 현금을 모두 긁어모아 낼 수 있는 최대한(60% 정도?)의 상속세를 냈지만, 전부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직 소송이 진행 중이고, 상속분할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기에 남편이 남긴 돈은 내 수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내 몫 이상의 상속세를 내는 것 자체가 나에겐 역부족이었다. 일단 먹고살 돈과 아이 학비 정도는 남겨야 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소송 중이라는 것도 이유가 되지 못했다. 일단 상속세를 내지 않았으니 국세청에서 압류를 한 것이었다.
내 계좌가 압류됐으니, 아이 이름으로 된 보험금 대출을 문의했다. 그런데 그 보험금도 전부 압류상태였다. 살 길이 막막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변호사는 딱히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변호사는 오히려 아이 계좌가 압류됐으면 아이가 출국정지 당할 수도 있으니 그 부분부터 확인하라고 ‘조언’했다. 말이 좋아 조언이지, 거의 겁박으로 느껴졌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아이의 출국정지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처음에는 출입국 사무소에 가야 하나 싶었지만, 다행히 앱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넣어 확인하는 방법이 있었다. 매일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는 딸아이에게 출국 금지당하기 전에 호주로 가라고 말했다. 딸아이는 한 달 남짓 한국에 머물 요량으로 가장 싼 비행기표를 끊어 왔다. 그걸 바꾸는 데만 70여만 원의 추가 금액이 들었다. 하지만 그 금액을 주고서라도 일찍 가는 게 나아 보였다.
딸아이는 결국 2주 만에 호주로 돌아갔다.
그 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온 한해였다. 곧잘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 지붕에서 물통을 받쳐야 할 정도로 비가 줄줄 새는 날도 있었다. 딸아이 보험금을 대출하려고 했던 날도 사실은 지붕 수리를 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탓이었다.
자동차 사고도 가세했다. 가벼운 접촉사고로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살짝 금이 갔다. 타는데 지장이 없었기에 수리를 미루고 며칠 타고 다니다 폭우 오는 날 빗물이 새어 들어가는 바람에 자동차 기능이 마비되어 버렸다. 결국 보험처리를 했지만, 수리 비용이 엄청났다. 당연히 다음 해 보험금 할증으로 돌아왔다.
딸아이를 공항에 데려다주는 길에도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폭우가 쏟아졌다. 딸아이는 애써 웃으며 게이트 안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공항에서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폭우는 그치지 않았다. 솟구치는 내 눈물까지 더해져 앞을 보기 힘들었다. 어쩌면 내 인생의 폭우가 현실 속 폭우로 나타났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여겼지만, 이 폭우가 마지막 폭우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인생의 폭우도 현실 속의 폭우도 쉽게 그치지 않았다.
2022년 8월 8일~9일은 서울 경기 일대에 물난리가 난 날이었다. 강남 한복판에 자동차가 물에 떠 있는 사진도 올라왔다. 양평도 예외가 아니었다. 도로가 유실되고 산사태가 났다.
2022년 당시 우리 집 근처 도로유실 현장
8월 9일 아침에 아랫집 할머니가 문을 두드렸다. 밤새 비가 내린 뒷날이었다. 우리 집 토사가 할머니 집 뒤뜰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불평을 했다. 밤새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면서 비난부터 퍼부었다. 가서 보니 흙이 뒤뜰을 덮고 있었다. 60년인가 70년 만의 폭우라고 했으니, 천재지변에 가까웠지만 비가 그치는 대로 토사처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날 다른 일로 마음이 착잡했다. 바로 상속재산분할소송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날은 내 생일이기도 했다. 의미야 부여하기 나름이지만, 하필이면 생일날 재판정에 가야 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하필이면 폭우로 이웃 할머니한테 비난을 받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꾹꾹 눌러야 했다.
그날 우리 오빠는 내게 작은 웃음을 줬다. 케이크 사가지고 재판정에 가서 판사랑 함께 촛불 끄고 생일축하 노래 부르고 오라는 말이었다. 오빠 방식의 위로였다.
재판정 가는 길에도 비가 왔다. 재판정에 들어가서 ‘피고석’에 앉으라는 말에 흠칫 놀랐다. 피고는 죄지은 사람이란 인상이 강해서였는지, 갑자기 작아지는 느낌도 들었다. 민사 소송에서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가 청구인이자 원고, 상대방이 피고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만 알았던 탓이었다. 재판은 5분 만에 끝났다. 그저 기본 사실 확인 후 서류를 보완하라는 것이 전부였다.
허탈한 마음으로 집에 왔더니, 사촌이 말했다. 아랫집 할머니가 동네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집 언덕을 점검하고 갔다고 했다. 우리 집에서 일부러 물길을 아래쪽으로 텄다는 증거를 잡기 위해서였단다. 기가 막혔다. 그 할머니는 심지어 남편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내 손을 잡고 "차라리 우리 영감이 죽었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말로 나를 위로해 주던 분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세상을 향해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간신히 남편의 죽음에 따른 슬픔과 원망을 다독이면서, 소송도, 상속세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노라 마음먹고 있었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엄청난 세금을 내고도, 당장 딸아이 학비에 생활비까지 빌려야 하는 상황이 되고 보니, 나를 둘러싼 주변이 모두 적군으로 보였다. 나는 기댈 데가 없었고 무력했다. 그 무력감과 고립감을 나는 분노로 표출했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바짝 세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