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직장인 열전 - 조선 인물들을 통해 배우는 직장인 처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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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죽고, 태조 이성계가 병석에 누웠다. 이 시기에 하륜은 갑자기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이 난다. 혹시라도 이방원과 하륜이 결탁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정도전의 견제가 또다시 있었기 때문이다. 하륜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서둘러 조촐한 잔치를 열고 주변 지인들을 초대했다. 정도전의 훼방으로 아무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백수로 시간만 보내던 이방원도 잔치에 참석했다. 잔치 분위기는 점차 흥이 올랐다. 하륜은 거나하게 취한 모습으로 술 한 병을 들고 비틀거리며 이방원의 앞자리로 갔다.
“제가 대군을 위해 술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하륜은 심하게 손을 떨면서 술을 따르더니, 기어코 이방원의 옷에 끼얹고야 말았다. 순간 분위기는 싸늘해졌고, 이방원의 얼굴도 심하게 일그러 졌다.
‘내가 아무리 힘도 없이 백수로 지낸다고, 하륜도 나를 무시하는 건가!’
화가 치밀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기에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대감이 오늘 술을 좀 과하게 드셨군요! 그럼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방원이 화를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버리자 하륜은 제대로 사과를 해야 한다며 부랴부랴 이방원의 뒤를 쫓아나갔다.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골목에서 마침내 이방원을 따라잡은 하륜은 아까와는 정반대의 차분한 얼굴빛으로 말을 건넸다.
“대군, 좀 전에는 주위에 감시하는 눈이 많아 둘만의 자리를 만들고자 일부러 연기를 좀 했습니다. 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방원은 이제야 왜 그가 평소에 하지 않던 그런 실수를 했는지 이해되었다. 그리고 다음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신덕왕후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주상께서 병석에 누워있으신 지금이 기회입니다. 정도전을 치시고, 그동안의 잘못된 것을 다시 바로 잡아주십시오.”
“정도전이 나의 사병도 다 빼앗아가고, 관직도 다 앗아가 버렸소. 대감도 알다시피 난 아무런 힘도 없는데 무슨 수로 그를 제압합니까?”
“제가 이미 안산군수 이숙번을 포섭해 놓았고, 그를 따르는 300명의 사병이 있습니다. 거사를 일으키시면 그들이 달려와서 대군을 도울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는 동안 모든 것을 이미 준비해 놓은 하륜의 유창한 프리젠테이션 앞에 이방원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음 날 하륜은 조용히 충청도로 내려갔고, 몇 달 후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이방원의 기습에 정도전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과 하륜이 그전부터 뜻을 모으고 함께 거사를 계획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하륜은 언젠가 찾아올 타이밍을 기다리며 이숙번을 포섭하는 등 조용히 준비했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하루였다. 정도전에 의해 갑자기 지방관으로 발령받고 다음 날 떠나야 하는 그 찰나의 순간, 이방원을 만나 제시할 수 있는 집권 로드맵이 없었다면 이렇게 정확한 타이밍은 영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한다. 뻔한 말 같지만 역시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증명했기에 뻔한 진리가 되었다. 하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하륜이 이방원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이방원이 누구인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 그리고 고려 사수파로서 정치적 입장을 함께 했던 정몽주를 죽인 장본인이 아닌가. 고려 신하로서 의리를 저버리고, 조선의 신하가 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방원을 군주로 모신다는 것은 변절의 끝판왕이라 불릴 만했다. 하지만 그들은 손을 잡았다. 공동의 적 정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륜에겐 정도전과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다. 정도전이 신권 중심 정치를 추구한 반면, 하륜은 부국강병을 뒷받침할 강력한 왕권주의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이 정도전과 하륜이 가까워질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륜은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신진사대부였음에도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후광으로 출셋길을 달렸다. 정몽주와 손을 잡고 고려 사수파에 섰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곧 조선의 신하가 된다. 그리고 존경하는 선배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과 손을 잡는다. 정도전이 좀 더 포용력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인물이었다면 아마 하륜은 정도전과도 손을 잡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배제해버리는 정도전의 성격상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신 하륜은 이해관계가 일치한 이방원과 손을 잡았고, 마침내 임금 다음 가는 실권자가 된다.
프레너미(frenemy)라는 말이 있다. 친구 ‘friend’와 적 ‘enemy’를 합친 말인 데, 실제로는 서로 싫어하지만 일 때문에 겉으로 친한 척하는 관계라는 말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열 명 중에 여섯 명은 이런 관계인 사람이 있다고 답했다. 초등학생 때야 친구가 마음에 안 들면 “나 너랑 절교임!” 하고 안 보면 그만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직장인은 그렇지 못하다. 인맥이 중요한 직장에서 그런 철부지 행동을 했다가는 왕따 되기 십상이다. 직장은 좋든 싫든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성과를 내야 하는 조직이다. 개인적인 감정은 억누르고 회사의 성장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곳이다.
하륜도 아마 속으로는 이방원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가 적었을지도 모른다. 정몽주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신하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하륜에게도 꿈이 있었다. 강력한 왕권이 뒷받침되어 부국강병을 이루고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조선을 만들어보자는 꿈 말이다. 그 목표를 위해 프레너미 이방원과 손을 잡았다.
마음이 안 맞는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은 분명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내가 직장을 계속 다니기로 마음먹었다면 그것은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도우며, 서로를 이용해야 한다. 성인군자라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도, 나도, 직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절박한 상황 속에 있었던 이방원과 하륜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륜과 정몽주에 대한 후일담을 한 가지 덧붙이자면, 태종의 집권 후 정몽주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충신으로 인정받고 명예를 회복한 것이다. 물론 하륜이 적극적으로 나섰기에 가능했다. 그가 태종과 손을 잡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결과로만 본다면, 하륜은 명분도 실리도 다 잡은 최후의 승리자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