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직장인 열전 - 조선 인물들을 통해 배우는 직장인 처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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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집권 이후 왕권강화를 위한 의지를 표명하며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신하를 숙청했다. 하지만 하륜은 70세가 되어 은퇴를 고민할 때에도 태종이 직접 만류할 만큼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오랫동안 관직 생활을 유지했다.
하륜이 태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함께 결정적 공을 세웠던 이숙번도 결국 유배를 당해 죽은 것을 보면, 하륜이 오랫동안 관직 생활을 한 것은 단지 그 이유만이 아닐 것이다. 하륜에게는 어떤 특별한 점이 있었던 것일까?
함흥차사라는 유명한 사자성어가 유래된 설화가 있다. 이방원이 세자 방석과 정도전을 죽인 일에 큰 충격을 받은 태조 이성계는 함흥으로 낙향해 버린다. 왕위에 오른 태종이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계속 차사(사신)를 보내지만 그때마다 죽임을 당한다. 떠나면 감감무소식이라는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긴 배경이다. 결국 태종이 태조의 스승 무학대사를 보내고 나서야 드디어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그 말이 사실인가! 드디어 태상왕(태조)께서 한양으로 돌아오고 계시다는 말인가.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어서 아버님을 뵈러 나갈 준비를 해야겠다.”
들뜬 태종에게 하륜은 조용히 조언을 한다.
“전하, 경하드리옵니다. 다만 아직 태상왕께서 노기를 완전히 가라앉히지 못하셨을 수도 있으니, 만약을 위한 준비는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곤룡포 안에 갑옷을 받쳐 입으시고, 천막의 기둥을 굵은 나무로 세워주십시오.”
자신에게 특별한 신하였던 하륜의 말대로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태종은 아버지를 맞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멀리서 태종의 얼굴을 본 태조는 또다시 치솟아 오르는 분노와 울분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태조는 순식간에 활을 집어 들어 태종을 향해 화살을 날렸고 놀란 태종은 재빨리 기둥 뒤로 숨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같은 날 저녁, 태조의 귀환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이번에도 하륜은 태종에게 조언을 한다.
“태상왕의 분노가 아직 크신 것으로 보이니 일단은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내시에게 곤룡포를 입혀서 그에게 먼저 술을 올리도록 하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곤룡포를 입고 걸어오는 내시를 보고 태조는 숨겨둔 철퇴로 그를 내리쳤다. 곧 태종이 아님을 확인한 태조는 그제야 그의 즉위를 하늘의 뜻인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부자지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살벌한 에피소드지만 하륜이 태종의 목숨을 결정적으로 두 번이나 건진 것이다.
하륜의 직장 생명력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가 태종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던 점도, 정치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신하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사의 의중을 눈치껏 이해하면서도 절대 선을 넘지 않는 탁월한 처세 덕분이었다.
태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취한 여러 수단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선위 파동이었다. 일부러 세자에게 선위 하겠다고 선언한 다음 신하들의 반응을 보고 딴마음을 보이는 자는 단칼에 날려버린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태종의 처남인 민무구와 민무질이었다. 그들은 인척이었음에도 숙청에 예외는 없었다. 태종의 최측근 이숙번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태종이 양위를 선언하자 그는 하륜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주상이 선위 하시면 제가 국방을 맡고 그 외의 업무는 왕과 정승이 공동으로 통치함이 어떻겠습니까?”
“이보시오, 어떻게 임금과 정승이 함께 통치할 수 있겠소. 임금과 정승은 각자의 자리가 분명히 있는 것이오.”
하륜은 이렇게 대답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신하로서 지켜야 할 선은 절대 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실제로 태종의 선위를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태종이 선위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자, 그의 약한 고리를 건드리며 태종의 마음이 약해지게 만들었다.
“정 선위를 하시겠다면 먼저 태상왕께 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성급하게 부왕께 고하지 말라. 과인이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
태종이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은 태조 이성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하륜이 그의 의표를 찌른 것이다. 그래도 태종이 선위를 고집하자, 이번에는 태조와 동년배로 존중받던 신하인 영의정 성석린을 끌어들인다.
“주상전하의 명이 옳지 않으니, 노신(老臣, 성석린을 말함)이 영상의 자리에 있는 한 절대 교지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륜은 말로만 선위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실제 태종이 선위를 거두어 들일 만한 구실을 계속 제공하였다. 태종의 뜻을 제대로 알아차리고 반대를 하면서도 그의 체면은 살려주었던 것이다.
반대로 이숙번은 결국 숙청을 당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되는 일화가 전해진다. 태종이 두 번째 선위 파동을 일으켰을 때 이숙번과 독대를 한 적이 있었다. 이숙번도 다른 신하들처럼 태종에게 선위를 만류했다.
“선위는 잘못된 것이니, 직접 정사를 챙겨주십시오.”
“천재(天災)가 심하니, 과인의 부덕함으로 인해 하늘과 부합하지 않음이 두려울 뿐이오.”
“선위 했다고 해서, 그 재앙이 없어졌다는 말을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 대화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 무거운 짐을 도대체 언제 벗어던져야 한다는 말이오.”
“사람의 나이는 50이 되어야 혈기가 쇠하여지니, 그때까지 기다리셔도 늦지 않습니다.”
이숙번은 말실수인지 본심인지 모를 말을 무심결에 뱉어버린 것이다. 공교롭게도 태종이 50세가 되는 때는 세자가 23세가 되어 왕위에 오르기 충분한 나이였다. 이것으로 이숙번은 완전히 태종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그가 태종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하고 긴장하고 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말실수였다. 상사의 언어를 대하는 반응에서, 한때 나란히 태종의 최측근이었던 하륜과 이숙번은 완전히 다른 결말을 보게 된다.
하륜은 태종의 언어를 정확히 이해한 신하였다. 태종은 “왕위를 넘길게.”라고 말했지만 사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왕위는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마.”였다. 하륜은 신하의 본분을 지킨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말의 진의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고 이숙번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하륜이 서릿발 같은 태종의 치세에서도 오랫동안 평탄하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인 셈이다.
태종의 선위 파동 사례에서 보듯, 하륜처럼 상사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직장 생활의 스킬 중 하나다. 물론 태종처럼 “나 이번 달까지만 회사 다닐게.”라고 상사가 말한다 해도 임금의 말이 갖는 무게감과는 전혀 같을 수 없다. 더구나 상사가 회사를 그만두든 말든 그것은 개인의 선택 문제이지 내가 왈가불가할 사항도 아니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주로 접하게 되고, 또 주의해서 들어야 할 상사의 언어는 바로 업무지시와 관련된 것이다. 성격이나 업무 스타일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상사들은 직설적인 화법보다 은근히 돌려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예를 들어 상사가 “그 건은 언제 보고받을 수 있나?”라고 물어본다면 나의 보고 계획 일정이 궁금한 것이 아니다. 급하고 중요한 건이라 어떻게 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니 빨리 보고하라는 뜻이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음… 아직 제가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못 했습니다. 내일이나 이틀 뒤에 보고 드리면 될까요?”라고 태평한 소리를 하면 상사는 당장 인상을 찌푸릴 것이다. “보고서 작성을 위해 요청한 자료를 추가로 확인하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늦어도 내일 오후까지는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처럼 정확한 상황을 설명하고 최대한 빨리 보고할 수 있는 때를 예측하여 상사에게 전달해야 한다.
상사가 업무에 대해 정확히 지시하고, 언제까지 끝내라는 명확한 가이드라인도 함께 주면 실무자 입장에서는 정말 일하기 편하다. 그렇지만 상사의 스타일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상사가 “이거 좀 한번 알아봐요.”라고 흘리듯 이야기했는데 별것 아닌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뭉개버렸다고 하자. 그런데 며칠 후 갑자기 상사가 그 건에 대해 다시 물어본다면 그 앞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상사가 아무리 대충 흘러가듯 이야기하더라도 일단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면 즉시 나의 주요 업무로 삼아야 한다.
결국 이것은 ‘직장인의 눈치 보기 능력’과 매우 관련이 높다. 물론 나의 직장 동료, 후배, 고객들을 상대할 때도 적당한 눈치는 매우 중요하지만, 나의 편안한 직장 생활을 위해서 상사에 대한 눈치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 점에서 하륜은 상사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하륜은 직장인이라면 어떻게 눈치를 보아야 하는지 그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는 실용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유학자였음에도 풍수지리에 통달하고, 역학과 관상에도 능했다는 것이 그러한 일면을 잘 보여준다. 명분에 집착하지 않았기에 적당한 때를 기다릴 줄 알았고, 존경하는 선배 정몽주를 죽인 원수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절대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넘지 않았다.
변절자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조선에 들어간 하륜은 선배 정도전의 끊임없는 견제와 괴롭힘에 시달렸다. 뛰어난 실력자이면서 자신과는 정치적 이념이 맞지 않았기에 ‘같이 갈 사람’ 목록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권력투쟁의 양상이었지만 하륜은 몇 차례의 실패를 교훈 삼아 무작정 반발하거나 들이받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너무 앞서 나가지 않고 자신의 때가 오기를 준비하며 기다린다.
개구리는 동면해야 할 때와 땅 밖으로 나가야 할 때를 안다.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영양분을 지켜내야 할 때와 비로소 꽃 피울 때를 분별한다. 하륜은 제대로 실력 발휘할 기회도 없이 정도전에게 끊임없이 괴롭힘 당하는 신세를 한탄만 하지 않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사병을 거느린 이숙번을 포섭하고, 이방원에게 제안할 집권 로드맵을 미리 작성하는 등 해야 할 일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었다.
직장 선배나 상사 등 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이 있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특히 내가 실력이 있다는 이유로 극심한 견제를 받고 있다면 억울함까지 더해져 더욱 그럴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이 퇴사 충동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가 상사의 갑질 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쉬운 대처 방법은 역시 퇴사다. 자신의 몸과 정신을 해칠 정도라면 과감히 퇴사하여 다음 직장을 찾는 것이 좋겠지만, 이 직장에서 살아남을 각오를 한 상황이라면 일단은 몸을 숙이고 기회를 잡겠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실력을 기르며 내 주위의 아군들을 한 명씩 늘려가자. 나의 어려움을 이해해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는 것은 직장 생활에 큰 활력소가 된다.
하륜은 프레너미 관계에 있는 이방원마저 자신의 아군으로 삼았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도 업무적으로 도움이 필요하다면 친근한 관계를 만들고자 노력해야 한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정도전 같은 선배마저 나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하륜조차 해내지 못한 그 일을 내가 해낼 자신이 없다면, 실력을 쌓고 우군을 늘려가며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면 하루도 견디기 힘들던 나의 직장 생활은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어느새 일 년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온다면 좋겠지만 혹시 아직 그렇지 않더라도 충분히 나 자신을 대견스럽게 생각해도 된다. 벌써 일 년을 견디어냈으니 말이다.
상사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도 직장에서 오래 살아남는 비법이다. 하륜은 왕위를 세자에게 양도하겠다는 태종의 말을 정확히 해석하여, 선위를 하면 안 된다고 태종에게 진언하여 태종의 권위를 더 높여주었다. 가짜 충신을 숙청하기 위해 살벌한 언어를 쓴 태종만큼은 아니어도 직장 상사들도 종종 실무자에게 그러한 언어를 구사하고는 한다. 가령 지시한 보고는 언제 할 건지 가볍게 지나가듯 물어보는 것 말이다. 직장 생활에서 가장 치명적인 마이너스 요소는 바로 상사와 소통이 잘 안 된다는 점일 것이다. 상사의 말만큼은 귀를 쫑긋 세워 듣고, 그의 성격과 평소 업무 스타일을 고려하여 의중을 잘 헤아려야 한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무엇보다도 나의 직장 생활이 편해진다.
눈치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의 마음을 그때그때 상황으로 미루어 알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살벌한 전쟁터 같은 직장에서 눈치 빠른 것은 가장 큰 무기 중 하나가 된다. 상사의 말이나 행동을 눈치껏 잘 이해하는 사람은 직장 생활이 편해질 수밖에 없다. 나를 견제하는 선배라고 해도 눈치껏 꼬투리 잡히는 일이 없도록 행동하면 언젠가 나에게도 기회는 온다. 70세가 되어서도 태종이 은퇴를 만류했던 하륜처럼 그렇게 끝까지 살아남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