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통을 잘하면 일도 잘한다,
황희 (1)

조선 직장인 열전 - 조선 인물들을 통해 배우는 직장인 처세법

by 신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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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의 대명사, 황희

항상 ‘황희 정승’이라고 불릴 만큼 황희는 우리에게 정승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대왕이 가장 신임했던 오른팔 황희 정승.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황희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 1363년 강릉 부사 황군서의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왕조의 신하가 되었던 1389년은 역사적, 정치적 격변의 시기였다. 그로부터 3년 후 이성계에 의해 고려가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이 건국된 것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두문동에 낙향한 72명의 현자들 중 한 명이 황희였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조선 왕조로 입조 하게 된다.

황희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태종의 신임을 받아 지신사로 있던 박석명이 자신의 후임으로 그를 추천하고부터였다. 지신사는 왕의 기밀을 자세히 알면서 주요 사안들에 대해 조언을 해야 하는 자리다. 현재의 비서실장처럼 막중한 임무를 가진 자리였기에 많은 이들이 꺼리는 자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황희는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고 그의 능력은 태종의 기대에 크게 부응했다. 또한 황희는 지이조를 맡아 태종의 의중을 잘 반영하여 정승들의 인사권을 제한하는 악역을 맡기도 하였다.


“이 말이 누설된다면, 그것은 나 아니면 네 입에서 나온 것이다.”


태종은 황희와 둘만의 비밀 대화를 나눌 정도로 황희를 크게 신임했다. 하지만 황희가 태종의 신뢰를 한순간에 잃고 마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 사건이었다.



태종과의 소통에 실패하다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본래 인품과 문장이 훌륭하여 태종의 총애와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세자가 되었다. 하지만 엄격한 궁중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온갖 비행을 일삼아 태종의 미움을 받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다른 양반의 첩을 몰래 궁궐로 납치해 오고 심지어 아이를 낳기까지 했다.


“내가 너를 그리 아껴주었거늘, 어찌 이리 망령된 행동으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느냐. 사대부의 첩과 몰래 밀회를 즐기고 장인의 집에 숨긴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갖게 하다니…. 내가 이 일로 너의 장인 김한로를 파직시키기까지 한 사실을 알면서 또다시 그 첩 아이를 만나러 갔다고? 네가 정녕 이리도 나를 거역할 셈이냐!”

“주상전하께서는 마음대로 첩들을 줄줄이 들이시면서, 저는 첩 하나도 갖지 못하게 하십니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반항하는 양녕대군의 모습에 태종은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고는 신하들을 불러 모았다.


“세자가 여러 날 불효하였지만 스스로 그 잘못을 깨닫길 바랐는데 과인은 더 이상 양녕대군의 계속되는 비행을 참기 어렵소. 과연 임금으로서 장차 사직을 맡겨도 될지 크게 근심이 될 지경이오. 이에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대군을 대신 세자로 삼을까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떻소?”



태종의 의중을 알아차린 신하들은 일제히 찬성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황희가 폐위를 반대하고 나선다. 그의 어조는 단호했다.


“전하, 어찌 그리 쉽게 세자를 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조선은 유교 이념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입니다. 장자가 왕위를 계승해야 마땅한 이치이며, 또한 부족함이 있더라도 다시 제대로 가르치면 될 일입니다.”

“어떻게 경이 나한테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가. 내 수족이라 여기고, 중요한 일들은 전부 자네와 제일 먼저 의논했거늘…. 혹시 양녕대군이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 부탁이라도 하던가?”

“전하, 어찌 다른 사심을 품고 감히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마땅히 충심으로 드려야 할 고언을 올렸을 뿐입니다.”

“됐다. 더 듣기 싫으니, 썩 물러가라!”


태종은 늘 문제가 생기면 황희와 먼저 의논했다. 사실 세자 교체 문제도 모든 신하들에게 공식적으로 말하기 전에 황희에게 먼저 의중을 보이고 논의도 했던 바였다. 그렇게 신뢰했던 황희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서자 태종의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화가 많이 났다. 황희가 미래 권력인 양녕대군에 줄을 서서 권력다툼을 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태종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 발생한 1, 2차 왕자의 난으로 뿌려진 핏자국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을 때였다. 황희 생각에는 그때와 같은 일이 반복되어 왕권이 흔들리는 일이 재발해서는 안 된다는 충심의 발로에서 섣부른 세자 교체를 반대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주의를 지향하는 태종은 황희의 반대를 자신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태종의 의중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상사와의 소통에 실패한 황희는 서인으로 신분이 강등되어 4년 동안 유배당하는 참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마도 이때가 황희로서는 인생의 가장 큰 고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세자가 훗날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이었기에 망정이다. 만약 도량이 좁은 왕이었다면 두고두고 황희를 미워하며 다시는 조정으로 불러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자를 교체하기로 한 태종의 선택이 역사적으로 옳았듯이, 내가 판단하기에 불합리해 보이는 상사의 결정이 결과적으로 옳을 수 있다. 리더는 여러 종합된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라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일단은 리더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잘못된 방향임이 객관적으로 명백하고, 조직을 위해 상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조언이라고 생각된다면 조언하는 것이 맞다. 다만 ‘잘’ 해야 한다. 아무리 상사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라고 해도 상사에게 의견을 개진할 때는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가능성은 없을지 미리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혹시라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상사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한 적은 없는가? 그것은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태종이 황희의 조언을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듯이 상사는 그 말의 잘잘못을 판단하기보다 자신의 지위가 공격받는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자신의 의견이 조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지 한 번 더 생각해 본 뒤, 직언보다는 우회적으로 리더가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말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업무를 진행하거나, 상사에게 의견을 제시할 때 상사와의 올바른 소통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내가 아무리 일을 잘하고 옳은 의견을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지 결정은 상사가 하는 것이다. 나의 성과를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상사와 주파수를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의 실수는 없다


“황희는 주상에게 반드시 필요한 인재일세. 그를 다시 불러서 일을 맡기도록 하시게.”


자신의 의지로 황희를 내쫓았지만 태종은 왕위에서 물러난 뒤 새 임금이 된 세종에게 황희를 다시 불러들일 것을 부탁했다. 대간을 중심으로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세종은 황희를 불러들여 그의 직첩을 돌려주었다.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황희였음에도 세종은 그의 실력을 보고 중용하였으며 마침내 모두가 선망하는 정승 자리에 올라 영의정 18년을 포함하여 무려 24년이나 정승 자리를 지켰다. 이것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양녕대군 폐세자 사건으로 큰 교훈을 얻은 그는 철저히 세종의 의중을 헤아리고자 노력하였다. 그러한 황희의 충성심에 화답한 세종은 육조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서사제를 도입한다. 본래 육조직계제는 태종 때 도입된 것으로, 육조의 판서들이 직접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여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킨 제도였다. 하지만 왕이 아닌 정승들에게 먼저 보고하도록 한 의정부서사제를 도입했다는 것은 그만큼 황희가 이끄는 의정부에 대한 신뢰가 깊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세종의 자신감과 황희에 대한 믿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때 세종의 반대자로 낙인찍혔던 황희는 이제 세종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신하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무조건 세종이 하라는 대로 따라가기만하는 예스맨은 아니었다.


“옛 제도라고 하여 무조건 바꿀 수 없습니다.”


세종이 한꺼번에 너무 많은 개혁제도를 도입하려 하면 급격한 변화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더 이상 황희에게 태종 때의 실수는 없었다. 왕의 의중을 완벽히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과감 없이 진언하는 신하와 그러한 조언을 받아들이는 임금. 세종 시대의 르네상스는 그야말로 상사와 부하의 완벽한 소통이 이루어낸 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훗날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거듭 사직을 청하자, 세종은 보름에 한 번씩만 출근해도 좋다는 재택근무를 허락한다. 심지어 누워서 일해도 괜찮다고 할 정도였다. 황희는 8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관직을 사임할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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