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연구 세미나 후기 (1)
지난 글에서 AYARF(아시아 청년 액티비스트-리서쳐 펠로우십) 컨퍼런스에 다녀온 후기를 적었다. 연구도 하고 활동도 하는 '액티비스트-리서쳐' (일명 연구활동가)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연구활동가는 학문연구자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연구활동가로서 우리가 하려는 ‘듣는 연구’의 방향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가고 싶다는 욕구도 샘솟았다.
지난 글
우리는 문서나 숫자로 연구하기보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잘 반영한 연구를 하고싶다는 마음에서 ‘듣는연구소’를 세웠다. 그런데 막상 '듣는연구'가 일반적인 질적연구와 어떻게 다른지를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질적연구 공부를 하고 대학원에 가서 논문을 써보았지만, 우리가 하려는 듣는연구는 학문적 질적연구와 다른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얼마나 달라도 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이제까지 우리가 했던 연구 작업을 돌아보면서 연구활동가로서 듣는연구 방법은 어떻게 잘 할 수 있을지 발전시켜보기 위해 듣는연구 오픈 세미나를 했고, 우리 뿐 아니라 비슷한 고민을 가진 동료들과도 함께하고 싶어서 페이스북에 공지를 올리고 원하는 분을 초대했다.
세미나를 두 회로 나눠서 했는데 1회는 우리가 기존에 했던 작업물을 평가하면서 질적 연구방법론을 어떻게 잘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2회는 앞으로 우리가 좀 더 하고자하는 당사자 참여형 연구법의 하나인 커뮤니티 기반 참여 연구(CBPR)를 공부했다.
공지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는데 소수만 초대할 수 있었다. 이 글은 함께하지 못한 분들과도 스터디 내용을 공유하려는 기록이다. 그러므로 길다. 길어서 3번에 나눠 썼다. 관심 있는 분께는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글을 읽고 다음에 또 함께 스터디나 연구를 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댓글이나 facebook 메시지로 반갑게 연락을 기다린다.
첫번째 이야기: 연구활동가의 연구법
세번째 이야기: 당사자가 공동연구자로 참여하는 '커뮤니티 기반 참여연구'
먼저 '액티비스트-리서쳐'에 대한 위의 두 글을 읽고, 연구활동가의 연구법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스터디에는 듣는연구소의 우군과 하진, 함께 연구했던 희원과 쑤, 그리고 퍼실리테이션 회사에서 일하는 케이와 봄이 함께했다. 다들 연구와 실천을 병행하는 연구활동가로서 경험과 정체성을 갖고 있다.
처음엔 퍼실리테이터인 케이와 봄이 왜 이 스터디에 함께했을까 궁금했다.
봄: 저희 회사에선 퍼실리테이터를 '프랙티셔너'라고 불러요. 퍼실리테이션 한 결과를 이론과 연결한다든지 의미있는 컨텐츠로 만들어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컨설팅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전 과정이 프랙티스인 거죠. 저희가 하는 일이 액티비스트이면서도 리서쳐이기 때문에, 연구활동가에 대한 글에 공감이 됐어요.
봄은 현장에서 발견한 정보로 유용한 지식을 만들어내려고 할 때, 학술연구의 방식이 잘 들어맞지 않음을 느낀다.
봄: 학술연구는 선행연구가 가진 한계를 내 논문에서 풀거나 해서 학술적 의미를 발견하는 건데.. 우리는 현장에 가서 다양한 맥락이나 작용을 보면서 관계를 분석하잖아요. 그걸 할 때 보이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그걸 학술연구 형식으론 담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문서에 담기지 않은 수많은 요인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항상 어려워요.
봄은 퍼실리테이터로서 현장에 갔을 때 발견하는 다양한 맥락과 작용, 관계를 하나의 보고서로 담기 난감하다고 했다. 연구활동가들의 활동은 현장에서 이 점에 모두 공감했다.
기본소득 활동을 하는 희원은 AYARF컨퍼런스에 발표자로 참여했던 '공인된' 연구활동가다. 기본소득이란 의제를 던지고 그와 관련된 여러 활동을 하면서 얻은 시사점을 다시 책이나 팟캐스트 등 다양한 형식의 콘텐츠의 연구물로 모아서 재개념화하고, 다시 사회에 던진다. 또, 생계를 위한 연구 용역을 병행하기도 한다.
그는 연구활동가의 연구와 학술연구는 목적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방법과 결과물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희원이 생각하는 연구활동가의 연구는 문제해결이나 사회변화를 위한 좌표를 짚어주는 것이다.
희원: 학술연구는 엄밀성이 중요하니까 주제에 깊이 들어가서 봐야 하겠죠. 하지만 우리에겐 문제해결이나 사회변화를 위해서 이 연구나 활동이 어디에 쓰일 수 있는지 종합해서 인용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정책으로 풀든지 사업을 풀든지요. 제 입장에선 그런 액션을 못하고 연구만 하면 답답할 것 같고 한편으로는 활동하면서 액션만으로도 즐거워서 막 나가는 건 만족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연구와 활동을 병행하겠지요.)
그도 봄처럼 연구나 활동을 하다보면 예기치 않게 '보이고' '읽히는' 의미있는 현상들이 있는데, 거기서 얻는 시사점과 의미들이 연구 과업 밖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담아낼지 고민이라고 한다. 현장에서 여러가지 의미있는 발견이 있더라도, 과업에 해당하는 내용만 연구보고서 안에 담아서 납품하는 것 외에 정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혁신을 위한 활동과 연구를 계속해온 하진에게는 아직 연구자라는 말이 낯설다. 하진은 최근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고 있는데, 기획자이자 실천가로서 살아왔던 태도가 몸에 배인 터인지 늘 "기획이 먼저 가 있어" 학술연구를 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고한다. 기획자의 접근법은 현장에서 얻은 정보와 빠른 감각을 통해 대안을 먼저 제시하고 실천해가지만, 학문연구자는 이론을 바탕으로 논리적 정합성을 쌓아가며 신중하게 결론을 도출한다. 이런 접근법의 차이 때문에 연구활동가로서 연구와 학술연구자로서 연구를 할 때 '모드 전환'이 쉽지 않다. 그는 연구활동가는 이 두 접근법을 자유자재로 써야하는 건지, 혹은 꼭 학문연구자의 것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건지 궁금하다.
하진: 학술연구를 해야 하는데 계속 기획을 하는 거지. 상황에 대한 대안을 빠르게 먼저 생각하고 가 닿아 있으니까 논리정합성을 구성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이제까지 썼던 언어나 사고 구조가 익숙치 않은 것이겠죠. 그렇다면 연구활동가들은 두가지 사고 전환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게 아니면 자기가 뿌리를 둔 도메인이 연구든 활동에든 있으면서 사이드로 다른 걸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의문이 들었어요.
연구와 실행을 병행하는 연구소에서 일했던 쑤는 연구 역량에 대한 갈증을 풀고자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동안 연구는 멋있어보이는데 실행은 아무 것도 아니어 보이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고 그것은 "석박사들이 하는 연구에 비해 자신은 학사 나부랭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의구심이란 생각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들이 쓴 연구 결과가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만큼 구체적이지 않거나, 현장의 맥락을 읽었다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 보고서들이 많더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대학원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학문 세계에 있는 사람들도 간접적으로 혹은 궁극적으로 사회 변화를 지향하는 연구를 하지만, 그들의 목적의식나 방식은 연구활동가와 많이 다름을 느끼게 되었다.
쑤: 교수님이 넌 그러면 나중에 뭐하고 싶니 물어보더라고요. 제가 연구자와 플레이어가 있으면 "플레이어같은 연구자가 되고 싶어요." 라고 하니까 "왜 연구자는 플레이어가 아니냐"고 생각하냬요. 제가 "아카데믹한 페이퍼를 당사자들이 하나도 안 읽혀지게 쓰는데 현장이 어떻게 바뀔 수 있죠?"라고 하니까 곰곰히 생각하시더니, 그럼 대중서를 쓰면 되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장하준처럼요.
희원도 동의하면서, 연구활동가와 학문연구자는 사회변화를 만드는 플레이어로서 인식하는 '속도감'이나 접근 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희원: 학자들은 모든 성과가 논문으로 나와서 아카데미 안에서 파워를 가지면 그것이 정책 입안자들에게 전달이 돼서 사회가 변화하고..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대학원에 가면 교수들은 우리 학생들이 '마당 부터 쓸고 한참 수련하고 연마할 시간을 가져야 영향력을 갖추게 된다'고 하지만, 우리들은 지금 빨리 현장에 개입해서 할 일들이 보이잖아요.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연구활동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연구활동가들은 이들이 연구하려는 것은 학문연구와 목적이 다르다. 하나의 논문에서 하나의 학술적 의미를 찾는 여정이라기보다, 현장의 변화를 보면서 사회변화를 위해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액션을 찾는다.
이들이 현장에서 발견한 다양한 현상과 작용, 의미들은 학술연구물(하나의 연구질문에 대한 보고서 형식)로 다 담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존에 연구방법에 대한 레퍼런스들이 대부분 학문연구의 것이라서 학문연구 방식을 차용하려 했지만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연구활동가들만의 연구방법론, 연구 작성과 평가의 기준, 연구물을 교류하고 서로 발전시킬 플랫폼이 필요하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무엇이 필요한가로 이어졌다. 학문 연구가 정형화된 방법론과 틀을 갖추고 질적으로 우수한 연구의 기준이 무엇인지 가이드해 주는 것처럼, 연구활동가에게도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쑤: 교수님에게 ‘왜 이 형식으로 써야하죠?’ 라고 물으면 어느 정도 정형화 되어있는 방법론을 제시해 주는 것 처럼, 우리에게도도 활동이나 연구에서 어느정도 정형화 된 룰이나 가이드가 갖춰질 필요가 있어요.
또한, 연구 활동가들 사이에서 '잘 하는 활동 연구'에 대한 기준이나 사회적 인정 체계도 필요하다.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연구활동가라는 개념으로 소개했을 때 이해받을 수 있고, 연구활동가 내부나 외부에서 '연구활동은 이런 것', 더불어 '잘 하는 연구활동은 이렇게'라는 상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희원: 잘 하는 연구의 기준도 있으면 좋겠어요. 학문 연구자는 탑 저널에 인용이 많이 된다는 명확한 기준이 있는데, 연구활동가에게는 뭘까요? 좋은 연구를 서로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저 사람 연구 잘 한다’ ‘성장하고 있는 연구활동가야’라고 알아봐 줄 수 있는 지표가 있으면 신나게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체적인 방법으로 연구활동가의 지식이 유통되는 플랫폼이 생겨도 좋겠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연구활동가의 지식이 유통되는 플랫폼은 데모데이 같은 발표형식도, 브런치나 블로그 콘텐츠 형식도, 가벼운 저널 형식도 좋겠다는 등 다양한 상상이 즐겁게 이어졌다.
희원: 학문 연구는 학술지로 유통되고 인정되잖아요. 우리에게도 일정의 저널이라든지 다른 형식의 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항상 연구 공모에 지원해서 붙으면 겨우 연구할 기회를 얻는 정도인데. 어떻게 하면 좀 더 우리가 만들어 내는 지식이 유통되게 할 수 있을까요? 너무 어렵게 하지 않더라도 스타트업 데모데이 처럼 가볍게라도요. "이런 걸 연구했어요" 라고 하면 문제 해결로 어떻게 연결해 줄 지 서로 얘기하는 거죠.
자연스럽게, 마치 짠 것처럼, 이야기는 연구활동가의 방법론과 지표, 서로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플랫폼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고, 잠시 쉰 다음 본격적으로 '듣는 연구법' 중 하나라고 생각이 되는 연구활동가의 질적연구법에 대해서 공부했다. (다음화에 계속)
by 듣는연구소 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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