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리니아 Mar 20. 2024

올봄이 작년 봄의 나에게

중년의 테피스트리

     

넌 친한 언니가 봄이 되면 이사 간다는 소식에 가을부터 마음이 아렸었지. 어렸을 적 군인 가족으로 살면서 추억을 나눈 베프들을 떠나보내는 일이 익숙해서 이별이 두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지. 어른이 되어서도 이별은 낯설고 널 다시 어린아이로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됐어. 


이제 같이 커피 마시자고 불러낼 칭구도, 시간 맞으면 아무 영화나 보러 갈 칭구도 없을 나의 외로운 나날들을 걱정했지. 그래서 벽장 안 오랫동안 처박아둔 재봉틀을 꺼내 우리 집 강아지 패셔니스타 만들 계획을 세우고, 또 빵을 만들면 시간이 잘 갈 거라고 오븐을 샀어. 하지만 빵 취향이 다른 남편을 위해, 더더군다나 나 혼자 먹으려고 빵을 만들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를 거야. 오븐보다 죽은 빵도 살린다는 토스터기를 사는 게 더 나았을 거야.  미싱은 대학 때 미싱질을 못해 꿈을 접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정신건강을 위해 다시 제자리로 가게 될 거야. 정말 심심해서 주리를 틀었더구나. 대신 곧 맛있는 비건 빵집을 두 군데나 뚫을 거고, 친구가 문화센터 수업에서 강아지 옷을 만들어 줄 거니까 상심은 하지 마.     


 그 언니랑 15년간 참 많은 일을 나눴더라. 그중 코로나 때 단 둘이 갔던 바다를 잊을 수가 없어, 카페 취식이 안 돼서 햄버거와 커피를 테이크아웃으로 차 안에서 인적 없는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그것만으로도 코비드 스트레스가 풀렸었지.     

자주 오겠다고 으레 하는 인사를 하며 떠난 그녀를 보낸 봄날, 내게 꽃샘추위가 유독 길었었지. 근데 말이야 그녀는 진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1년 사이 세 번이나 내려올 거거든. 막연히 긴 이별이 될 줄 알았는데 계절마다 만나는 사이로 우리의 우정은 더 깊어졌고, 다음 봄에는 그녀의 초대로 서울에 가게 될 거야.     


요가 선생님이 유방암 1기 전이라 시술을 하러 가셔서 몇 달간 요가원 수업이 중단되니, 넌 엄마 잃은 아이 마냥 풀이 죽어 있었어. 혼자만의 시간이 더 무수해졌지. 외로운 사람이 정해진 루틴대로만 지내면 버틸만하지만, 외로운 루틴이 더 늘어나기 때문에 우울해질 수 있을 거란 걸 처음 알게 됐어.


하지만 봄이 지나고 더위가 찾아올 때, 더 이상  무료하게 지내지 않으려고 필라테스를 등록하고 잘 맞는 선생님도 찾게 될 거야. 그리고 '그림책 명상 수업'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설레는 특강 수업을 통해 코비드 이후로 모르는 사람 앞에서 처음으로 네 얘기를 나누게 될 거야, 그 시간은 새로운 경험이고 힐링으로 남을 거야.     


그리고 혼밥의 지평이 넓어지고, 혼자 책 읽기 좋은 카페도 발견할 거고, 혼자 바다도 가게 될 거야. 아 그리고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혼자 호캉스도 가게 될 거야. 비록 뜬눈으로 밤을 새우겠지만.......


 6년간 해 온 스페인어 스터디는 멤버들과 추구하는 노선이 달라 와해 됐었지. 속상해하지 않아도 돼. 뜻이 맞는 한 명의 멤버와 스터디는 이어질 거고, 둘의 염원대로 대학에서 청강으로 새내기들과 원어민 교수님 수업을 듣게 될 거야.       


찬 바람이 불면 예년처럼 어깨병이 도질 거고, 병원에서 요가를 6개월간 중단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운동 없이 어찌 살지 막막해져서 잠시 방황하며 김종국으로 빙의했더랬지. 하지만 운동 없이 지내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 오히려 운동 강박에서 벗어나니 꽤나 시간이 많아져서 우리 집 강아지가 제일 신났어. 땡볕에도 한겨울에도 매일 산책을 가게 되어 분리불안이 나았거든. 대신  내 얼굴에 기미가 늘어서 피부과에 생돈을 들이게 될 거야.     


갱년기 이후로 노안 때문에 책 읽기를 멀리했는데 그것도 핑계였더라. 정말 심심하니 도서관에서 10여 년간  읽은 책만큼을 올 한 해 대여해서 읽게 될 거야. 그러던 어느 날 보물 같은 ‘곽세라’ 작가님 책을 만나고, 내 몸에 대한 모토를 바꾸게 될 거야. ‘난 약하지 않다’라고. 남에게 보이는 모습이 아닌 나 스스로 아름답고 건강한 몸을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떠올리게 될 거야. 그래서 전보다 마음대로 먹게 되고, 다이어트를 공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인생이 더 아름다워질 거야.


또 ‘브런치 스토리’라는 읽기의 보물창고에서 소름 돋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을 읽다가 너도 글쓰기 취미가 생길 거야. 일주일에 이틀간 글을 쓰면서 치유되는 체험을 할 거야. 심심해서만 쓰게 된 건 아니야. 아픈 성혜가 내게 글을 써보라고 용기를 줬어. 그리고 그녀로 인해 15년 만에 함께 자취했던 대학친구들과 재회를 하게 돼. 나를 설명할 필요가 없고, 가식 없이 지낼 친구들 덕분에 재미있는 계획이 늘어나니 무미건조했던 중년이 더 풍성해질 거야.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넌 석 달도 안 돼서 요가를 다시 시작할 거야. 그리고 요가 선생님은 다행히도 예상보다 훨씬 빨리 회복하셔서 요가원에 복귀하셨어. 천하무적 마돈나 선생님을 더 추앙하게 될 거야. 넌 다시 선 매트에서 더 정성스럽게 호흡하며 스스로를 가다듬을 테니, 멈춤이 축복이라는 것에 감사하게 될 거야. 지금의 무료함을 즐겨둬. 내년 봄에는 넷플릭스 볼 시간조차도 없을 정도로 바빠질 테니.      


넌 감기로 한 달을 아플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거고, 조금만 무리하면 몸에서 반응이 나타나니 온전히 쉬는 시간의 가치를 알게 될 거야.


항상 봄맞이를 새 옷 준비로 했지? 다음 봄에는 온라인, 오프라인 모두 쇼핑하는 시간을 아끼게 될 거야. 어차피 내 일과는 강아지 산책과 운동이 다니깐. 새 옷이 주는 기쁨은 처음 입고 나갈 때뿐인 걸 알고 있잖니. 앞으로는 옷을 사고 생기는 지출로 인한 스트레스가 없어질 거야. 그래도 새로운 아이템이 그리울 때면 찾아갈 빈티지 옷가게가 생길 거야. 얼마나 소소한 기쁨인지 몰라. 장작 2시간 거리를 가야 한다는 것만 빼면 말이야. 그런데 늘 수확이 완벽해.     


넌 코비드가 끝난 지난봄에 코로나 때 보다 더 고립된 생활을 하며 침잠해 있었지. 하지만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기적이 내게도 이루어질 거니까 찡그린 미간 좀 펴고 다녀


여전히 함께 차 마실 동네 친구가 없고, 새로운 맛집을 발견하고 같이 감탄할 상대는 없지만, 다음에 친구랑 다시 올 계획에 설렘도 커져. 내 안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늘어나니, 지나간 과거에 안주하는 시간과 막연히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생각하는 대로 뭔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만 바라보기에도 벅차. 자발적 외톨이로 지내는 지금, 내 인생이랑 가장 친해진 기분이야. 

                                                                                          -이번 봄 지난봄에 쓴 일기를 읽으며-

작가의 이전글 행복은 성공순이 아니잖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