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커트라인은 60점이면 충분하다
2022년 9월 초등학교 5학년 딸과 함께 시작한 유럽여행의 첫 발은 로마였다. 처음 가는 유럽 여행이었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하는 딸아이의 관심을 고려한 것이라는 핑계였지만 실상은 아시아나 마일리지로 무료 항공권이 가능하면서 내 스케줄에 맞춰 출발일을 고려하다 보니 다른 도시가 아닌 로마가 딱 맞았다.
역시 공짜, 무료는 중요하니까~ 하지만 그냥 무료는 아니었다. 유류할증료 등 예전 같으면 거의 경유 비행기 가격과 맞먹는 추가 비용이 들었다. 코로나로 인한 일시적 상승이라고는 하지만 사악했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의 도착지는 로마가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20년도 전에 나온 책이다. 그 당시에 매우 유명했지만 솔직히 서양문화나 역사에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읽지 않았다. 게다가 너무 유명하면 왠지 일부러 남들과 똑같은 것을 하기 싫어하는 고약한 습성도 한몫했다.
그런데 로마에 다녀와서 얼마 되지 않아 로마를 알고 싶어 졌다.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광장에서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그 감동의 역사를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여러 가지 책도 있고, 쿠팡플레이나 티빙에서 다큐멘터리도 봤지만 역시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없어졌기에 바로 동네 알라딘 중고서점으로 갔다.
역시나 오래된 책이자 유명한 만큼 중고책도 많았고 가격도 저렴했다. 인터넷에 보니 6권까지가 재밌다고 하던데 한 권에 불과 5,000원을 넘지 않는 착한 가격에 주저 없이 1,2,3권을 샀다. 첫 장을 읽으면서 이미 본전을 뽑았다. 로마에 5일간 머무르면서 도대체 이 도시국가가 어떻게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나 역시 로마인을 통해 배우고 생존하는 방법을 습득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992년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에게 쓴 서문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라고, 로마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만이 그토록 번영할 수 있었을까요.
2022년 감히 대적할 수 없지만 11월 5번째 책을 출간한 작가로서 소중한 나의 책인
'인생 커트라인은 60점이면 충분하다'에서 나는 내가 국내 유일의 식품 전공, 식약처 출신 식품전문변호사로 살아남았던 이유를 아래와 같이 적었었다.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4,000여 개의 법령 중에서 식품위생법이나 축산물위생관리법 관련 사건을 해본 변호사는 아주 많이 잡아도 5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이다. 3만 명의 변호사 중 5퍼센트 즉 1,500명 중에서 식품을 전공한 변호사는 1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이며 그 15명 중 식품의약품안전처에 근무해본 변호사는 없다. 결국 식품을 전공하고 식품의약품안전처에 근무한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 내가 유일한 것이니 나보다 법을 잘 아는 변호사는 많겠지만 식품 분야는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으로도 생각해 보았다. 대학에서 식품을 전공한 졸업생이 5,000여 명이 매년 배출된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1970년대부터 40년을 잡으면 약 20만 명의 식품 관련학과 졸업생이 있는데, 그중 사법고시나 변호사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0.1퍼센트나 있을까. 그 200여 명 중 식품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는 역시 20명, 10퍼센트도 없을 것이고 그 중 식품의약품안전처 근무 경력이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최근에 상담을 해보면 간단한 사기, 이혼 사건에 대해서도 전문변호사를 소개해 달라거나 전문 변호사인지 묻는 경우가 많다. 변호사라면 누구나 일반적으로 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 그때서야 이해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분명히 전문변호사가 확실히 다른 분야도 있다.
전문변호사라면 최소 그 사건을 수십 건에서 수백 건 하면서 관련 법령의 제개정 이력을 알고 있어야 하고, 다양한 사례를 통한 적절한 대응력과 전문가들과 인맥이 필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식품분야에서는 내가 독보적이 되었다. 이미 휴대폰에 4,000명이 넘는 식품인의 휴대전화가 저장되어 있다. 그 4,000명 안에는 식품전공 교수, 전국 지자체에 근무하는 식품위생감시공무원, 식약처 공무원, 식품 대기업 임직원, 식품 중소기업 대표 및 임직원, 식품 기사를 써본 기자와 방송작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다.
다시 로마로 돌아가 보면 처음부터 독특한 체제를 만들고 지중해를 제패한 국가는 아니었듯이 나 역시 2,30대 불안한 과거로 심한 방황 끝에 나중에 생각해보니 운 좋게 방향을 잡아 지금에 이른 것이 너무 비슷하다고 끼워 맞추고 싶어졌다. 지금 로마인 이야기 3권을 읽으면서 그라쿠스 형제 이야기에서 다시 한번 숙연해지고 겸손해야 함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함과 나아갈 곳과 그러지 말아야 할 타이밍을 잘 살펴야 함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있다.
떼르미니 역에 내린 딸과 내가 낯선 풍경에 경계를 늦추지 않고 걸어갔던 까사미아 민박집까지 갈 때만 해도 나는 왜 로마에 왔지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다빈치 공항에 내려 익스프레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풍경은 그저 동남아랑 다르지 않았고 뿌연 하늘과 서울 같은 대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모습에 솔직히 많이 실망했었다. 그저 민박집에서 하루 만에 먹은 컵라면과 밥, 김치가 반가웠다는 정도가 솔직히 다였다.
하지만 역시 무지하면 느낄 수 없다는 말이 맞았다.
다음날 로마 시내에 들어가면서 내 생각은 그냥 바뀌었고, 가는 곳곳에서 입을 다물 수 없는 경외감과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수가 없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어린 딸이 지치든 말든 미친 듯이 2, 3만보를 걸어 다니면서 그냥 2000년 로마의 역사를 느끼고 싶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마치 눈을 감으면 내가 그 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은 아마도 로마에 가본 사람이라면 반드시 경험했을 것이다. 만일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분명히 로마를 잘 못 본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프란치스꼬라는 세례명이 있지만 10년 넘게 냉담 중인 것과 무관하게 바티칸에 가서는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고, 벽과 천장 바닥 어디를 보더라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 시대의 역사가 눈에 선하게 다가왔다. 좋은 가이드를 만나서 일수도 있다. 첫날 형제가 하는 마이 리얼 트립의 가이드, 형은 바티칸을 동생은 트레비 분수를 비롯한 여러 명소를 안내해 주었는데 정말 박식하고 노련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유럽 여행에서는 너무 많은 일정을 잡지 말아야 하고 하루 한두 개가 충분하다는 조언을 듣길 잘했다. 오전 일찍 줄을 잘 서서 바티칸 구경을 마친 우리는 점심은 사랑하는 한식을 먹고 잠시 쉬다가 오후 다양한 명소를 방문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원래 시차 적응을 잘하는 것인지 나이가 들어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인지 어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나와 달리 눕자마자 잠을 잘 잔 딸은 신나게 구경 다니면서 친구들 선물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고, 바티칸의 감동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아빠와 오후 2시가 되어서야 까사미아 민박 근처 서울식당인가 한식당을 찾아서 밥을 먹었다. 역시나 사춘기 딸은 떡볶이....
점심 후 민박집에서 오후 일정까지는 1시간 반 정도가 남아서 한숨 자고 싶었지만 저녁에 잠이 안 오면 시차 적응에 더 힘들까 봐 참았다. 그 시간 우리 귀여운 따님은 역시나 와이파이 터지니 휴대폰... 스노우로 자기 사진을 찍어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더니 이쁘냐고 물어보고 다시 고치고.. 뭘 해도 너는 안 이쁠 수 있겠니라고 마음속으로 대답했지만 겉으로는 못난이라고 부르는 아빠의 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라빠르망 같은 유럽 배경 영화를 보면서 너무 길도 좁고 불편해 보이고 왜 저런 건물을 헐어버린 후 우리처럼 새로 높고 편하게 지어 살지 않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역시나 내가 무식하고 무지해서 모른 거였다. 수백 년부터 수천 년 역사를 보존하고 소중이 생각하는 마음이 단순히 관광수입 때문은 분명히 아닐 거다. 우리랑 정말 다르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로마도 결국은 망했다. 로마인이야기3 책의 표지 뒷면에 이런 문구가 있다.
성공한 자에게는 성공했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가 따라다니는 법이다.
로마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라쿠스 형제 시대부터 시작된 로마의 혼미는
그들의 사치나 퇴폐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
이것이 그들 입가에 머물던 우수의 정체며 고뇌였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고, 겸손해야 한다.
다시 내 직업 얘기로 돌아가서, 10년을 넘게 식품전문변호사로 일하면서 어느 정도 자리도 잡았다. 대한민국에 나름 큰 식품 사건으로 메인 뉴스에 보도가 될 정도라면 기자든지, 해당 회사던지 일단은 인터뷰 문의나 상담이 온다. 그리고 상담료도 선입금해야 만나주고, 자문회사도 대기업부터 스타트업까지 40여 개가 매월 자문료도 낸다. 그동안 식품법 전문서적도 4권이나 출간했고, 이제는 식품분야에 있는 사람이라면 '김태민 변호사가 식품분야 전문변호사'라는 얘기를 들어봤다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그래서 어느 순간 덜컥 겁이 났다.
나태해지면 안 된다.
불과 15년 전 식약처 공무원 생활 그만두고 로스쿨 시험 볼 때 월급이 200만 원을 간신히 넘었던 시기를 잊으면 안 된다.
로스쿨 다니면서 결혼에 아이까지 생겨 절실함을 잊지 말자고, 3학년 1년을 고시원 생활하면서 김밥으로 점심 때우면서 공부했던 것을 잊지 말자.
등 따습고 배부르면 이 짓도 끝이다.
그래서 식품분야 외에 하나의 전문 분야를 더 만들기로 계획했고,
그것이 바로 보험이다.
두 번째 보험전문 변호사로의 출발은 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