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우 Nov 22. 2023

어제, 그리고 오늘

급성 인후염이였다. 최근 일정이 많긴 했다. 지난 금요일엔 미팅만 4개였는데 이젠 1일 미팅도 수를 좀 줄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빤 거절을 잘 못한다. 특히, 부탁에 약하다. 으례히 부탁이라면 내가 꼭 필요해서라는 느낌이 강한데 그로 인해 충족되는 자기 가치가 내 안에 큰 것 같다. 운이 좋게도 아빠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은 많고 그렇게 예스를 연발하다보면 꽤 버라이어티한 일정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아마 너도 그러한 듯한데 아빠는 할머니로부터 이어지는 편도선이 잘 붓는 유전적 특질이 있다. 일생동안 편도선은 아플때마다 조금씩 커져간다. 게다가 대부분의 감기가 편도선을 시작으로 두통, 몸살 등 가지를 넓히는 방식이다. 급성 인후염 역시 인후부위를 기반으로 세균 침투로 발생하는 질병 중 하나이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피로해지면 걸리기도 한다. 피로하면 면역력이 저하되고 그로 인해 세균 침투도 쉬워지니 말이다. 김영하 작가님이 자신은 항상 70% 정도만 일한다고 한 말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 고백하자면 아빤 100%도 자주 넘기고 그 피로함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성취를 즐기는 이상한 족속이다.


월요일과 화요일 이렇게 2일을 휴가내고 원래는 캠프며 각종 다양한 행사가 있었지만, 모두 취소되었다. 월요일 오전에 눈을 뜨자마자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병원을 찾았고 의사는 주사와 약을 처방해주었다.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빤 위장이 약하단다. 그래서 소염제, 항생제 계열의 약들은 위장에 상당한 부담을 주고 (현재 트렌드는) 이를 커버하기 위해 위장약도 같이 처방한다. 아마도 이비인후과 의사는 내 상태가 꽤 심각함을 알고 약을 쎄게 처방한 것 같다. 결국 월요일 저녁엔 위장 통증으로 응급실을 방문했다. 그날 저녁은 굶었고 약도 건너뛰었다. 할머니와 아빠는 치료를 위해 약을 일주일 먹는다면, 약 때문에 상한 위장을 다시 회복하는데 이주일이 걸리는 패턴을 반복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아예 약을 안드시려 하신다.


화요일의 가장 큰 이벤트는 마당의 리뉴얼이었다. 청도에 이사온 뒤 우린 잡초라는 거대한 적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텔레비젼을 보며 꿈꾸던 늘 푸른 잔디는 환상에 가까웠다. 게다가 아빤 네 건강이 염려되어 농약은 일체 쓰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잡초를 저지하는 것은 잡초가 자라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심리적 장벽외엔 없었다. (벌써 8년전)이사 초기에 열정이 넘치던 시절엔 출근 전 30분이나 비오는 날이면 잡초가 잘 뽑힌다는 이유로 잡초 제거를 하곤 했다. 그러다 잔디와 잡초를 같이 사육하기 시작했고 나중엔 제초기를 돌리는 것도 버거운 상황이 되었다. 할머니의 결단은 제초 매트를 깔고 그 위에 벽돌과 마사토를 깔아야 된다는 것이다. 


삼촌은 세상에서 자기 몸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다. '건강염려증'의 최상급 표현을 찾고 싶지만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삼촌이 일주일 딱 하루 쉬는 화요일에 와서 직접 마당 작업을 하러 와준 것이다. 원래라면 아빠도 월요일 캠프 참석 후 화요일 오전에 눈뜨자마자 청도로 출발하여 같이 일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오늘은 소일거리만 조금 도왔다. 할머니는 늘 피곤에 절여진 상태인데 마당, 나무 등과 같은 일에는 국가 중대사처럼 열정적이시다. 그걸 보고만 있자니 너무 괴로워서 오후엔 벽돌도 나르고 땅도 같이 파고 했다.


몸 상태가 안좋으니 하교 때 너를 데리러 가는 것은 아빠로 결정되었다. 요즘의 넌 학교가 마치고 학교 사람이 모두 나간 뒤에도 운동장에서 노는 걸 좋아한다. 평소 늘 누워있는 네게 이건 너무 훌륭한 체육활동이라 생각되어 할머니는 저녁시간이 아슬해질 때까지 네가 놀도록 한다. 아직 몸이 으슬으슬했고 행여나 네가 오늘도 그러면 큰 일이라는 생각에 파카를 챙겼다. 다행히도 삼촌이 왔다는 말에 넌 집으로 바로 가자는 설득을 받아들였다.


하필 이런 날은 네 엄마가 대학원 가는 날이라 널 재워야 했다. 일찍 자고 싶은 10살이 있을까. 애써 양치질 시키고 자려는데 넌 갑자기 책이 읽고 싶다고 했다. 안다. 넌 조금이라도 늦게 자고 싶은 것이다. 침실의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어라고 했더니 넌 한참을 집중해서 책을 바라봤다. 난 그런 너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아들아, 네가 책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모습에 큰 행복을 느꼈다. 행복은 대개 찰나이지만, 어제 그 시간은 마음껏 음미했던 것 같다. 널 재우면서 요즘 내가 묻는 질문은 "오늘 하루 뭐가 제일 행복했어?"라는 질문이다. 넌 "아빠가 데리러 왔던 거"라고 대답했다. 사랑한다, 아들. 네 말 하나에 가슴이 벅차고 모든 것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넌 자면서 항상 몸의 일부가 내게 닿는 걸 좋아했다. 발 끝에 내가 닿으면 다리를 쭉쭉 펼치면서 스트레칭을 하기도 했다. 오늘은 밤새 오른쪽 허벅지에서 오른쪽 어깨까지 번갈아가며 날 베개로 쓰는 통에 허리가 뻐근하다. 아마도 아빠와의 접촉이 네게 안정감을 주는가보다. 그게 또 기쁨이다. 매일 아침 하는 말이지만, 아빠는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한단다. 

매거진의 이전글 학부모 상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