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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Aug 20. 2020

센터

지나거나 혹은 머무르거나

우리는 계단을 오르내리기만 하지 않는다. 남편만 빼고 나와 딸은 계단에 자주 앉아있는 편이다. 집의 한가운데 위치한 우리 집 계단은 단순히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앉아서 쉬고, 책(계단은 주로 만화책)도 보는 또 하나의 공간이다.



예전 살던 집에도 내부 계단이 있었다. 딸아이는 그 집으로 이사 가던 날 계단을 수십 번쯤(과장 아님!!) 오르락내리락하더니 다리가 풀려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나의 자리는 여기'다 싶었는지 계단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계단에서 책도 보고, 그림도 그리고, 다양한 놀이를 했다. 딸은 계단을 '보라 버스’라고 불렀는데 보라 버스를 타면 이름처럼 신비한 다른 시공간으로 가는 듯했다. 보라 버스에 탑승하면 1인 다역의 다양한 역할놀이를 했다. 계단의 상승감과 다양한 높낮이가 다양한 시각을 선사하면서 놀이에도 많은 영감을 주는 모양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놀러 오면 계단에 옹기종기 앉아 책을 읽곤 했다. 그래서인지 딸아이의 그림에는 늘 계단이 등장하곤 했다. 계단이란 그런 곳이다. 지나기도, 그러다 앉아 쉬고 머물기도 하는 공간. 옛 로마의 원형경기장이 그렇듯 계단을 유연하게(flexible) 이용한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보라 버스로 불리던 옛날 집 계단


우리가 디테일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곳도 계단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곳도 계단이다. 보통 계단이 집의 한쪽 벽에 붙어 폐쇄적인 것과 달리 우리 집 계단은 집의 한가운데, 즉 센터에 있다. 사실 처음 이런 설계안이 나왔을 때는 너무 낯설어서, 작은 집에 비효율적인 것 같아서 당황했다. 하지만 우리 건축가들은 확신을 가지고 우리를 설득했고 우리는 동의했다. 2층에 얼마의 면적을 포기하면서 닫힌 공간이 아니라 거실로 활짝 열려 있는 공간으로 설계했다. 계단 폭도 넓게, 계단참은 넉넉하게, 난간 디자인은 심플하게 평철로 마무리했다. 계단을 지나다니는 통로로 생각하면 비효율적일지 몰라도 실제 하나의 공간으로 보면 활용도도, 만족감도 매우 높다. 우리 집 계단을 보고 동선에 너무 많은 면적을 빼앗긴 것 같다고 걱정을 하신 건축 설계사이신 이웃도 있었지만, 놀러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단 예쁘다고 많이들 칭찬한다. 난간을 작업하신 작업자 분께 말씀드렸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첫번째 계단 참에서 보는 우리집 거실
두번째 계단 참에서 바라보는 거실 풍경


자, 여기까지는 좋았다. 결정적인 실수, 옥에 티가 있다. 바로 조명이다. 계단 보이드 천장에 실링팬을 설치하면서 계단에 유일한 조명은 벽에 붙은 간접등 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스탠드를 사용해야 하는데, 계단 벽에 그 흔한 콘센트도 하나 빼놓지 않았다. 당시에 엉뚱한 곳에 정신을 빼앗기면서 에너지와 집중력을 잃었고 조명을 잘 챙기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랴. 아쉬운 대로 저 멀리 콘센트에서 멀티탭을 연결하여 피아노 위에도, 계단에도 스탠드를 놓고 사용하고 있다. 멀티탭과 전선 노출을 볼 때마다 눈에 거슬리지만 어쩌겠나. 집이란 완벽할 수 없다.


계단 턱을 보면 걸터 앉게 된다


집을 한번 지어본 사람은 10년 노화를 감수하고도 한번 더 짓고 싶어 하고, 집 지은 사람들 사이에는 다섯 번쯤 지으면 마음에 드는 집을 지을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난 아니다. 집 짓기는 한 번으로 족하다. 다섯 번 짓는다 해도 아쉽고 부족한 점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떤 집도 완벽할 수 없다. 그래서 살면서 완성해가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면 된다고 믿는다. 늘 지나다니고, 종종 앉아 쉬고, 가끔은 머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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