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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ul 31. 2020

수도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완공이 되고, 준공도 났고, 이사도 와서 잘 살고 있다. 그럼 이제 끝이냐고? 어쩌면 새로 시작이다. 집은 작아도 할 일은 태산이다. 시작부터 차 떼고 포 떼고 시작한 집이라 부족한 게 많기도 했고, 돈이 없으니까 우리가 직접 마무리해야 할 일도 많았고, 또 그게 집을 짓는 재미라고 생각했던 터라 할 일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집 지으면 꼭 만들어야지 하며 일찍부터 벼르기도 했고, 막상 살아보니 꼭 필요한 게 마당 수돗가다. 마당 이래 봤자 손바닥만 한 작은 마당이지만, 우리 라이프스타일에 수돗가는 꼭 필요했다. 마당 수돗가에서 텃밭에서 바로 뽑아온 채소를 씻고, 쪼그려 앉아 수건도 빨고 걸레도 빨고, 산책하고 와서 어푸어푸하며 세수하고 발에 묻은 흙을 씻어내고, 여름에 반려견 여름이 목욕도 시켜주고, 화분도 물도 주려면 수돗가가 필요했다. 딸이 말만 하면 바로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나의 맥가이버, 아버지가 다시 등판하셨다.


며칠간 동네 산책하며 버려진 벽돌을 한 장, 두장 모아두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낸 건재상에서 흙과 시멘트, 흙손 하나를 사 왔다. 진정한 기술자는 장비 탓을 안 한다고 했던가. 아버지는 없으면 없는 대로 가진 것으로 일을 하는 진짜 고수다. 아버지는 이사하면서 종적을 감춘 밀짚모자 대신 베트남에서 기념품으로 가져온 논을 걸쳐 쓰고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터닦이부터 시작했다. 삽으로 바닥을 파내고 막대기로 수평을 맞춘 다음 마지막으로 벽돌로 바닥을 다졌다. 시멘트와 모래를 적당한 비율로 섞고 물을 부어 반죽을 만든 다음 벽돌에 바르기 시작했다. 웬만한 건 다 잘하는 아버지지만 미장을 이렇게나 잘할 줄은 몰랐다. 이렇다 할 번듯한 도구도 없이 흙손 하나로 척척척. 아버지의 일은 대충 하는 것 같아 보여도 체계적이고 섬세했다. 어디서 주워왔는지 나무 막대기를 주워다가 각을 잡고 모서리를 세우면서 미장을 해나갔다. 모서리 각이 날카로우면 애들이 무심결에 긁힐 수 있다고 미술 붓으로 둥글게 라운딩 처리를 하는 디테일에 감탄했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쓸데없는 지식이 가득 찬 머리를 달고 다니면 뭐하나. 저렇게 몸으로 배우고 익한 기술은 얼마나 아름답고 유용한가. 어떤 일도 척척 해내는 아버지가 있어서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까지 아버지가 딸네 집 일을 해줄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나도 이제 자립을 해야 하지 않나. 툇마루에 앉아 아버지가 일하는 것을 보면서 더 나이 들기 전에 나도 쓸모 있는 기술 하나라도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빗물 길 터기와 섬세한 모서리 처리


두어 시간 남짓 수돗가 만들기가 끝나고, 아버지는 낮잠에 들었다. 딸네 집 수돗가 만들어주고 자는 낮잠은 세상 달콤한 것이겠지. 늘 웃는 얼굴인 아버지는 자면서도 웃고 있다. 그렇게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누가 마르지 않은 수돗가를 밟은 것이다. 가보니 선명한 발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아버지는 용의자로 엄마를 지목했고, 엄마는 마당에 나가지도 않았다며 자긴 아니라며 펄쩍 뛰었다. 그럼 아까 다녀간 택배 기사분? 아무래도 바쁜 택배 기사분이 동선이 아닌 수돗가까지 굳이 걸어갔을 것 같지가 않다. 이리저리 추리해보다가 나는 범인이 동네 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갑자기 재작년에 터키 에페수스 여행할 때 보았던 발자국이 생각났다. 유곽 앞에 새겨진 발자국은 '이 발보다 커야 들어갈  있다'는 의미로 한 마디로 '애들은 가라'는 표시라고 했다. 우리가 잘못했다. 우리도 '출입금지' 경고 판을 세웠어야 했다. 실수로 밟아놓고 떨고 있을지 모르는 그 아이를 위해 범인 추적을 중단하기로 하고, 아버지가 재빨리 물을 부어가며 발자국 흔적을 지웠다. (지나고 생각하니 발자국을 그대로 남기면 더 재밌었을 듯한데, 그 아이를 생각하며 지우는 쪽을 선택했다)


마당에 수돗가 하나 생겼을 뿐인데, 갑자기 부잣집이 된 것 같다. 집을 짓는 진짜 재미는 가족과 함께 하나씩 만들어가고 채워가는 데 있다. 예전에 엄마가 그랬다. 한꺼번에 살림을 장만하는 것보다 살면서 하나씩 장만하는 게 더 재미있는 거라고. 손 댈 것 없이 완벽한 집이 아니라서, 부족한 게 많아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큰 재미를 놓칠 뻔 했다. 이제 수돗가 옆에 꽃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금상첨화겠다. 뒷집 할머니 수돗가에는 빨간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우리 집 수돗가에는 어떤 나무를 심으면 좋을까? 그게 요즘 나의 즐거운 고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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