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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Apr 23. 2020

디테일

세면대가 뭐길래

곧 택배가 집으로 도착할 거라는 남편의 문자를 받았다. 마침 여름이가 컹컹, 하며 크게 짖기 시작했다. 택배가  도착했다는 소리다. 매일 이쪽을 지나다녔지만 여기에 집이 있는지 몰랐다면서 택배 기사 분이 '취급주의' 박스를 현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카톡으로 지령이 떨어진다. 혹시 깨진 데가 없는지, 부품이 다 왔는지 포장을 뜯어서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퇴근해서 하면 될 것을...이라고 말하려다가 순순히 박스를 뜯었다. 무거워서 옮기지도 못하고 현관에서 언박싱이 시작되었다. 뽁뽁이에 칭칭 감긴 박스 속에서 538이라고 쓰인 동그란 세면대가 뽀얀 자태를 드러냈다.



세면대가 뭐길래 이 난리를 떠나 싶다. 사실 지난 주말에 인천에 있는 대림 쇼룸에 가서 세면대를 골랐었다. 하지만 남편이 1층 게스트 화장실용 세면대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화장실 크기가 작으니 더 작은 세면대를 찾고 싶어 했다. 남편과 함께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발품 팔 시간은 없고 손품을 팔아야 했다. 이제 그만 하자, 라는 말과 동시에 마음에 드는 세면대가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 매우 흡족해하며 잠이 들었다.


근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린가. 다음 날 확인해보니 우리가 찾은 모델이 단종되었다고 했다. 어떻게 찾은 세면대인데 그냥 포기할 수 없지. 먼 친척 중에 건재상을 하시는 분이 있어 문의도 해보고 수소문해보았지만 재고가 없다고 했다. 단종된 세면대를 무슨 수로 찾겠나. 이제 포기를 해야 했다. 하지만 (세면대에 향한) 불굴의 의지(?!)와 넘치는 열정을 가진 남편이 인터넷 쇼핑몰을 샅샅이 뒤진 결과, 1개 남은 재고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와, 인정!


남편이 이 소란을 피우는 이유가 있다. 남편에겐 세면대를 고르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예쁜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니고, 비싼 것도 아니었다. 매일 자주 사용하는 세면대는 청소하기 쉬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유행하는 카운터형 세면대는 애초에 우리의 선택에서 배제됐다. 우리는 와일드한 사람들이라 물이 세면대 밖으로 흐르지 않게 우아하게 씻을 자신도 없었고, 카운터 위로 떨어지는 물을 매번 수건으로 닦을 자신도 없었다. 미국에서 홈스테이 할 때 세면대 밖으로 떨어져 마룻바닥에 흥건한 물 닦느라고 고생을 해서 씻기 싫을 정도였다. 남편은 전통적인 벽면 붙임 세면대 중에서 아래의 기준에 충족하는 세면대를 골랐다.


첫 번째, 네모는 안 된다.

보기에는 모던해 보이고 깔끔해 보여도 코너에 물때가 잘 껴서 청소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세면대 싱크볼이 둥글면 씻고 나서 바로 손으로 쓱 훔쳐가며 가볍게 청소할 수 있지만, 사각은 각진 코너 때문에 청소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남편은 실증 데이터까지 들이댔는데, 자신이 가본 집 열이면 열, 사각 세면대 코너에 물때가 끼어있었다는 것이다.  


[출처: 대림 바스 홈페이지]


두 번째, 턱이 없어야 한다.

턱이 두꺼우면 시각적으로도 세면대가 둔해 보이는 데다, 그 턱에 물이 잘 고여서 물때가 낀다고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집도 그런 세면대였다. 그 턱에 늘 물이 고여있고, 비누찌꺼기도 떨어져서 금세 물때가 끼곤 했었다. 그래, 이것도 인정!


[출처 : 대림 바스 홈페이지]


세 번째, 볼이 깊어야 한다.

볼이 깊지 않으면 씻을 때 물이 밖으로 많이 튀게 된다고 했다. 세면대가 작더라도 볼의 깊이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크기, 모양, 두께, 깊이에 대한 디테일한 기준을 가지고 찾아낸 것이 바로 이 세면대였다. 이러니 인정할 수밖에.

    

[출처 : 대림 바스 홈페이지]


오랜 기간 수집한 실증 데이터, 관리까지 생각하는 디테일한 기준을 가지고 세면대를 고르는 남편을 보면서 조금 반하고 말았다. (남편이 우쭐해하면 다시 꼴 보기 싫을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막연히 집을 짓고 싶은 게 아니라 나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집을 짓고 난 뒤 관리하고 청소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집을 지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에게 세면대 찾아 삼만리 얘길 해주었더니, 다들 백배 공감하면서 남편을 추켜 세웠다. 디테일을 놀라워했고, 청소를 직접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라며 남편을 칭찬했다. 별것도 아닌 세면대 하나로 득점하다니! 이런, 영리하고 경제적인 사람 같으니라고! 집 지으면서 최대의 수혜자는 아무래도 남편이 될 것 같다. 그렇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에게도 사람들에게도 인정도 받았으니 말이다. 이제 동네방네 소문난 그 명성에 걸맞게 사는 일만 남았다. 앞으로도 청소 잘하고, 집안 구석구석 알뜰살뜰하게 잘 살피는 남편이 되길 바란다. 그러면 지금까지 집 지으면서 속 썩인 죄, 탕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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