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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Dec 14. 2020

첫눈

그 특별한 지위에 대하여

엄마, 일어나 봐! 딸아이가 내 이불속을 파고들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며칠 전부터, 아니 작년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눈이었다. 새벽부터 눈이 온다는 소식에 잠도 설친 모양이었다.



사락사락, 이렇게 함박눈 내리는 걸 본 게 얼마만이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히고 눈에 묻힌 이 홀리하고 동화적인 풍경은 애어른 할 것 없이 사람을 설레게 만들지만 딸과 나의 온도 차는 실로 컸다. 흥분한 딸은 그대로 두었다간 잠옷 바람에, 아주 맨발로 뛰어나갈 기세였다. 눈에 파묻히면 이상하게 더 조용하다. 동네 시끄럽게 할까봐 딸을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몸까지 파르르 떨었다. 저렇게 좋을까? 저런 감정을 느껴본 지가 아득해서 신기하고 부러울 따름이었다.



반려견까지 온 식구가 총출동, 첫눈을 향해 나아갔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는 그야말로 백색소음(ASMR)이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눈 길을 걸으며 딸아이는 혼잣말을 했다. 아...봉숭아 물을 들였어야 했어. 몇 년 동안 봉숭아 물을 들이고 첫눈을 기다렸지만 눈이 오지 않아, 올해는 아예 봉숭아 물을 들이지 않았다. 무심코 흘러나온 저 말에서 딸의 마음에 뭔가 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 물론 자기 입으로 사춘기가 온 것 같다고 떠들고 다니긴 한다.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지, 막연하게 첫 사랑을 기다리는 건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와서 딸아이는 눈사람을 만들고, 남편은 마당의 눈을 쓸었다. 수고했다며 끓여준 옆집에서 끓여준 컵라면을 먹고, 아이들은 비료 포대를 구해서 뒷동산으로 썰매 타러 갔다. 나는 방바닥에서 뒹굴거리다가 추억의 영화 ‘주성치의 서유기’를 보고, 오꼬노미야끼를 부쳐 먹고, 솜이불 덮고 방바닥에서 뒹굴뒹굴하다가 불현듯 밤 10시에 유성우 잔치가 벌어진다는 뉴스가 기억나서 온 가족이 중무장을 하고 인근 무덤가로 갔다. 눈 좋은 남편만 겨우 별똥별을 봤고, 딸과 나는 멀뚱멀뚱 하늘만 쳐다보다 들어왔다. 남편과 딸은 최애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을, 나는 유성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국립 과천과학관 유성우 생중계를 보았으나 컴퓨터 화면으로도 유성우는커녕 별똥별 하나 보지 못하고 까무륵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일이 꿈만 같은데, 마당에 우리가 만든 눈사람이 그대로 있는 걸 보니 꿈은 아니었구나, 싶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첫눈이 가지는 지위는 얼마나 특별한가. 첫눈이 가지는 권력은 얼마나 강력한가. 잠을 설치게 하고, 마음를 설레게 하고, 몸을 부르르 떨게 하고, 아이는 아이이게 하고, 어른도 아이로 만들고, 첫사랑을 소환시키거나 첫사랑을 기원하게 하니 말이다. 



https://brunch.co.kr/brunchbook/ohmy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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