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왜 그랬는지 모를 쑥스런 이야기들 조차 즐거웠다.
하롱베이로 떠나는 날 아침 날씨는 맑음과 비가 오락가락했다. 우리 일행만 싣고 달리는 버스에서부터 수다가 시작됐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창 밖으로는 드넓은 평야의 모습이 끝없이 이어졌다. 프랑스 지배 탓인지 건축양식이 프랑스풍으로 땅콩처럼 좁다랗게 2층으로 된 붉은 기와지붕 집들이 초록 바바나 숲 속에서 여행객들의 이국적인 향수를 자극하고 있었다. 해변가 마을도 리조트가 즐비한 건축물들로 색다른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바다를 맞이하는 첫 풍경은 큰 산들이 바다 한가운데 둥실둥실 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도담삼봉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스케일의 봉우리들이 어지는 풍경 속으로 배는 느리게 떠갔다. 잠자리와 식사가 배 안에서 가능한 크루즈 여행은 휴식 자체였다. 수많은 섬들이 바람을 막아 호수인 듯 바다인 듯 파도가 없어 수면은 고요했다.
고수동굴 같은 석회암 동굴에 잠시 들렀고, 산 봉우리도 올랐지만 미동조차 느낄 수 없는 배 위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시간이 제일 좋았다. 가끔은 비가 내려 중첩된 봉우리가 마치 지리산 능선처럼 아담하고 그 위로 하얀 안개가 걸려 있는 아련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정겨웠다. 더위를 잊게 하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손에 전해오는 따스한 온기의 커피 향은 진하고 고소했다.
넷이서 넷이서 따로 또 같이 하루를 온통 함께 보냈다. 저녁을 먹고 3층 갑판 위로 올라갔다. 미리 준비한 맥주를 놓고 어두워져 가는 하늘을 보며 음악을 들었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듣다가 합창을 했다. 알 듯 모를 듯 이어졌다 끊기면서도 끝까지 따라 불렀다. 어둠이 내리면서 비가 내렸다 멈추기를 반복했지만 그럴 때마다 의자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갔다를 똑같이 했다. 포기는 없었다. 얼마 만에 얻은 시간인데.
버스가 하루 세 번 다니는 시골에서 살았던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대학을 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별생각 없이 지방 국립대에 입학했던 30여 년 전 우리는 무척 가난했다. 대학 공부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적응이 어려워 1학년 마치고 일찍 군 입대를 했고, 제대 후 함께 자취를 했다. 세월이 지났으니 세상에 좀 눈을 뜨기는 했지만 가난은 여전했다. 좁은 자취방에서 함께 자고, 함께 밥을 먹으며 살았다. 서로 머리를 깎아 주기도 했다. 영구머리가 되어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한 이삼일이면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용돈이 없어 집에서 보내온 쌀 한 가마니를 쌓아 놓고 삼시세끼 쌀밥만 먹으며 살았다. 쌀 가마니가 도착하는 날엔 청주역에서 자전거로 실어 왔다. 쌀 가마니를 풀어 헤지면 그 안에 깊숙이 들어 있는 검은 봉지에 꼬깃꼬깃한 용돈 3만 원과 김 서너 톳을 참기름에 구운 봉지가 들어 있었다. 마치 보물 같았다. 그 날은 하이에나처럼 밥에 굶주린 친구들이 몰려오는 날이었다. 밥이 먹고 싶은 친구들과 라면이 먹고 싶은 우리들의 이해가 딱 맞아떨어지는 날이었으니까. 라면을 들고 온 친구들에게 흰쌀밥을 먹였으며, 우리는 옆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아버지는 쌀 가마니를 어떻게 보내셨지? 버스에서 내려도 역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었을 텐데. 등에 짊어지고 가서 화물로 보내셨겠지. 아! 그땐 아버지도 지금처럼 할아버지가 아니고 더 젊으셨겠구나.
처음 친구와 큰 맘먹고 돈가스를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조금 기다리니 수프가 나왔다. 돈가스가 별 맛도 없다는 생각으로 핥듯이 다 먹고 일어서려다 종업원이 왜 가려고 하냐며 물어 우여곡절로 메인 돈가스를 먹었던 우스개 얘기도 나왔다. 한 달 내내 신문 배달을 해서 번 돈이 삼만 원이었는데 그 돈은 어떻게 썼는지 지금은 가물가물하다.
졸업하고 전공 따라 직장을 잡고 흩어졌다. 세 친구는 결혼을 하고 한 친구가 좀 늦게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아파트는 제일 먼저 마련했다. 그곳에 초대받은 우리는 아기를 업고 안고, 찾아갔는데 정작 초대한 친구는 연애를 하러 나가버려서 화가 났던 이야기가 자꾸 화제가 되었다.
그때야 다른 친구들은 결혼했고, 자신만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겠지 하고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지만 그때는 모두가 꽤 서운해 했었다. 놀리는 듯 너무 했다고 핀잔을 주면서도 안주삼아 웃으며 얘기할 수 있었다.
남의 눈에는 여행처럼 마냥 좋아 보이는 타향살이 뒷얘기 할 땐 울컥하는 설움도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진 일터. 남자 자존심에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와이프가 찾아가 한 달만이라도 기회를 달라고 졸랐던 이야기. 낯선 외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말 못 했던 애환을 들을 땐 자못 침울하고 슬프기까지 했다. 그랬었구나. 맨날 웃는 낯만 보아 속을 몰랐으니 이제라도 어깨를 토닥여줘야겠구나.
어리석고, 미안하고, 어설펐던 우리들의 청춘이 다시 소환된 하롱베이 밤하늘에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추억이 풍등처럼 둥실둥실 떠 다녔다. 당시엔 쑥스럽고 창피했던 이야기를 안주삼아 웃으며 얘기할 수 있으니 우리 삶이 좀 나아졌구나. 나이 먹고 철이 들어 여유가 생긴 탓이겠구나.
하롱베이에서 점심까지 먹고 돌아와 호안 킨 호수 주변 전통거리를 구경을 했다. 옛날 향수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으로 이름을 날렸던 추억을 간직한 콩 카페는 모든 것이 유치원 의자처럼 작고 불편했지만 북새통을 이뤄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여행 트렌드를 따라 하기 위해 코코넛 커피를 한 잔씩 마셨고, 비 주류파와 주류파가 건물을 마주 보고 마치 영화처럼 재회하며 서로 사진도 찍어 주었다.
사람들과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뒤엉켜 꼼짝도 못 하는 거리를 뚫고 다니다가 자리 한 맥주 골목에서 목욕탕 의자에 오순도순 앉아 재미있었던 얘기를 다시 꺼내 곱씹었다. 야시장 구경하러 먼저 나간 일행과 술이 불콰해진 남자들이 길을 잃고 헤매다 우연처럼 만났다. 인연인가 보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들만의 얼굴이 다시 또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신비를 맛봤다. 이산가족 만난 듯 환호했다.
'취한 듯 만남은 짧았지만 빗장 열어 자리했'(이선희 노래 -인연 중) 던 우리가 지금은 또 각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멀리 있지만 추억 때문에 언제나 함께 있는 우리들임을 확인했다. 생활에 지쳐 힘들고, 아프고 때론 갈등해도 여전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건 각자의 가슴속에 '우리들'로 뭉쳐서 함께했기 때문이리라.
내년 여름휴가는 일찌감치 동해바다로 계획을 잡았다. 아이들 홀로 집에 놔두고 금요일부터 일요일 늦은 밤까지 가이드해주느라 여행인 듯, 아닌 듯, 혹여 누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맘 쓰고, 어느 한 곳 맘에 안 들어 속상할 까 봐 손님 치루 듯 노심초사했을 친구 부부를 위해 고국(?)의 바닷가에서 우리가 준비하기로 했다.
가을로 접어는 드는데 계절인데 벌써 여름을 기다리게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