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는 상상력을 발현시킨다. 직, 간접으로 접한 것들의 잔상이 기억 속에 잠들어 있다 문득 깨어난다. 뱀을 보면 서늘한 무서움에 몸이 움츠러든다. 아이스크림은 혀에 닿기도 전에 시원하고, 진갈색의 방울방울 초콜릿은 이미 달다.
도시에도 이미지가 있다. 그중 춘천은 거대하지 않아 위압적이지 않고, 북한강과 소양강이 휘돌아 깊은 가운데 가볍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공지천 때문인 듯 복잡하지 않고, 조용하면서 엄숙하고, 소박한 느낌이다.
별로 긴요하지 않은 것 같은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뜻밖에도 춘천이 가깝게 다가왔다. 어떤 때는 왜 이 길이 만들어졌는지 의아해할 만큼 한가한 때도 있다. 촘촘한 일정도 없이 그냥 점심 먹고 드라이브나 하려고 나섰는데 장맛비가 쏟아졌다. 갈까 말까 망설여질 만큼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이미 맘이 나섰다는 건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다. 구십 킬로에 크루즈를 맞춰놓고 빗속을 달렸다. 비는 적군처럼 세차게 달려와 유리창에 부딪치고 힘없이 스러졌다. 아스팔트 길 위로 흐르는 빗물이 차바퀴에 튕겨져 비말이 뿌옇게 일어나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비가 좀 잦아들자 저 멀리 산등성에도 목화솜처럼 하얀 안개가 드문드문 피어오르고 있었다. 간벌된 소나무들이 비바람을 맞으며 휘청대는 모습이 길 잃은 패잔병같았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이탈리아풍의 산토리니 레스토랑이었다. 진한 영산홍 빛깔의 기와가 장식된 이탈리아식 건물로 4차선 대로변에서 뒤로 산을 등지고 저 멀리 춘천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건물로 들어서자 입구엔 작은 분수대가 있고, 2층으로 가는 계단엔 코발트와 흰색이 어우러진 각진 건물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은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푸른색 유리잔들이 모든 테이블에 세팅되어 있었다. 빈자리가 없나 잠시 낙담했지만 종업원이 창가 자리로 안내한 후 여분의 테이블 하나를 치워 오붓하게 둘이서 식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창 너머로 이탈리아에 온 것 같은 -어느 블로그에서는 이탈리아 종탑보다 더 이탈리아 같다고 표현하는 –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흰색의 사각기둥이 아래를 받치고, 처마 위에 아기천사 조가들이 얹혀있었다. 그 위에 작고 뾰족한 탑을 올렸다. 종은 지붕 안쪽에 달려 있었고, 밖에서 보면 유리 없는 창 같은 공간이 네 개가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종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냥 별다르지 않은 레스토랑이다. 이탈리아 종탑 모형을 세워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블루와 화이트의 이미지로 무장한 이탈리아 풍경은 해외여행이 많아진 요즘에도 여전히 동경의 대상이 되는 가보다. 진짜 같은 풍경을 연출하기에는 딱 맞는 곳이었다. 블로그나 카페에서 입소문을 타고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불러오는 순환고리가 만들어지면 비로소 그곳은 명소가 되는 것이다. 유명 검색 사이트에서 춘천 가볼만한 곳을 검색하면 그곳이 제일 앞에 나온다. 나도 그렇게 이끌려 이곳까지 왔다. 종탑이 위대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생각한 이가 위대한 것이다. 산토리니 레스토랑은 이미지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앉은 테이블 창 밖으로 비 내리는 모습이 가까이 보였다. 방부목으로 만들어 논 발코니로 처마에서 잦아드는 빗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씩 느리게 첨벙첨벙 떨어졌다. 고인 웅덩이 물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다시 튀어 오르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으니 슬로모션 같았다. 턱을 괴고 연인을 보듯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으니 편안했다. 물 한 방울이 떨어지면 웅덩이 물이 움푹 들어가며 온 몸으로 받아 다시 왕관처럼 모양 좋게 튀어 오른 후 다시 내려앉으며 파동과 함께 잔잔히 퍼져갔고, 고요해질 즈음 다시 한 방울이 첨벙 떨어졌다. 단순한 반복이 눈과 마음의 평화를 불러왔다. 차창에 달려와 가뭇없이 부서지던 저돌적인 빗방울과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똑같은 빗방울인데.
창가의 여유를 너무 즐긴 탓인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비는 내렸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거의 두 시가 다 돼서 종탑으로 나갔다. 멀찍이 있는 종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국적인 풍경은 사진에서 더욱 이국적으로 보였다. 전망대 앞에서, 옆에서, 네 기둥 안에서, 멀리 시내가 보이도록, 다시 전체 종탑이 보이도록 각도를 달리해 사진을 찍었다. 사진으로 이탈리아 여행 기분을 내기엔 충분했다. 내 사진을 본 사람들이라면 “너 이탈리아 갔다 왔구나”하며 부러워할 것이 분명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러간 듯했지만 시간은 겨우 두 시를 조금 넘고 있었다. 계획되지 않은 여행의 시간은 덤으로 느껴진다. 시간을 인식하는 우리 뇌 속의 도파민이 고장 난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춘천 거리 몇 군데는 더 다녀도 넉넉할 듯싶었다.
문득 가고 싶은 곳이 생겨났다. 바로 전날 JTBC의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서 유시민 작가의 에티오피아 전쟁 기념관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났던 것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 작은 주차장은 차들로 가득했다. 역시 TV는 위대했다. 공지천 옆에 위치한 에티오피아 전쟁 기념관엔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전쟁 기록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관의 50여 석은 꽉 찼고, 뒤에 서 있는 사람도 있어 잠깐 들이밀기에도 미안할 정도였다.
건성건성 보고 에티오피아 카페에 갔더니 그곳에도 빈자리가 없었다. 거리는 아열대성 기후처럼 후텁지근한 날씨가 끈적끈적 피부로 느껴졌다.
집으로 가는 길 인근에 김유정 문학촌으로 발길을 돌렸다. 작은 시골마을에는 볏짚으로 엮은 초가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볏짚이 아니고 나일론 끈으로 마치 볏짚처럼 흉내를 낸 것이었다. 도자기나 민화 체험하는 곳도 있었다. 문학은 체험할 수는 없으니 유사한 것들로 채워놓은 것이다.
김유정의 생가는 유료 입장이었다. 그의 글 쓰는 모습을 상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시골집일 뿐인데 유료라고 하니 좀 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헌책방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았으련만. 김유정이 원했던건 이게 아닐 수도 있는데. 관광홍보센터에서 방명록 사진 찍고 이메일로 추억 한 장을 받았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듯 또 맑은 지역을 두루 통과하며 느리게 달리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서먹해져 뜬금없는 얘기가 튀어나왔다. 아내가 물었다.
“왜 나를 선택했어?”
“당신은 나한테 없는 걸 많이 가지고 있어서 좋았지?”했더니
“지금 후회 안 해?”
“후회 안 해. 당신이 내 인생 최고야!” 목소리를 키워 당당하게 대답했더니 알쏭달쏭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정말이야. 후회 안 해. 당시에도 최고의 선택이었고 지금까지도 쭉 변함없어. ”
믿을 수밖에 없다는 듯 아내는 다시 웃었다.
길 위에서 비는 가늘었다, 굵었다를 반복했고, 리듬을 타듯 부부의 대화도 침묵과 웃음, 처마 끝에서 간신히 밀려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느리게 오갔다. 평온한 여운이 길 위로 떨어지며 춘천이 점점 뒤로 밀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