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갈대 녹음에 복사되어 초록으로 물들었다
바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나도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와 바람은 닮았다. 닮고 싶다. 투명한 모습과 자유로운 냄새와 바람의 꼬리와 영혼까지도.
순천만 습지의 바람은 갈대숲 오른쪽 끝에서 왔다가 나를 스치고 왼쪽 끝으로 빠져나갔다. 바람이 나를 갈대로 알았는지 다시 왼쪽 끝에서 달려와 머리칼을 스치고 오른쪽으로 달아났다. 위에서 내리 덮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고난처럼 휘돌아 몰아치다, 장난꾸러기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한 여름 뙤약볕 아래 습기 머금은 바람은 바다를 스치며 결빙되었다 갈대 녹음(綠陰)에 복사되어 초록으로 물들었다. 추운 날엔 더 나겠지만 더운 날엔 더운 줄 모르겠다. 어둠이 내려도 결코 두렵지 않다. 집 떠나 아주 멀리멀리 왔지만 밤하늘 별을 헤일 수 있는 여유가 있고, 내 한 몸 누일 수 있는 공간의 안심이 편안함을 더했다.
갈대와 참 못생긴 짱뚱어와 발소리에 놀라 갯벌 속으로 재빨리 숨었다 살며시 고개를 내미는 게와 진흙과 저 멀리 소나무와 한 무리를 지어 나르는 참새와 다리가 긴 백노와 방부목으로 나를 건너 주는 다리와 계속 눈을 맞추고 얘기했다.
베이스 기타 음이 배경에 깔리고 붉게 물들어 가는 석양을 바라보는 벤치를 실루엣 잡은 영화 속 한 장면을 상상하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앉아만 있어도 좋겠다. 행복하겠지. 그림처럼.
이번 가을엔 다시 근사한 그림 속 주인공이고 싶다.
그때도 바람이 불어 주겠지. 열매가 익는 마른바람이겠지만 그게 다 순천에서 나를 쓸고 간 바람이겠거니 생각한다.
쉼이란 한가한 갈대숲 길을 시간 정하지 않고 걷는 것이다.
쉼이란 오늘 집에 돌아가지 않고도 어둠 깔리는 낯선 땅에서 한 몸 누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고, 누군가의 수고로 그냥 쉽게 맛난 것 먹고, 누워 잠만 자고, 아무 생각 없이 아침에 일어나, 이불 개지 않고, 신발 신고 나서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쉼이란 마땅히 할 일도 없으면서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아도 내 발길이 머무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것이다.
쉼이란 머릿속 시계가 혼란을 일으켜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간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 듯 하루가 일 년 같은 것이고, 그러다 문득 밀물처럼 가득 찬 시간이 한꺼번에 목까지 조여 올 때 다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갈 길을 계산하면 억장이 무너지겠지만 쉼은 계산하지 않는 것이다.
쉼이란 돌아가 내가 앉을 의자가 거기 있는 '다행'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