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으로 겨울을 달리다.
세상의 수많은 일들은 과연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물처럼 촘촘하게 짜인 계획에 의해 정해진 순서대로 발생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너무도 쉽게 ‘아니다’ 일 것이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과 얽힌 일들이 폭풍우와 파도에 휩쓸리듯 자신도 모르는 곳에 있을 수도 있고, 의지와 관계없는 일에 얽매일 수도 있다.
갑자기 찾아오는 일들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겨울 어느 날 아침 손톱만큼도 생각 없었던 알몸마라톤대회를 참가하게 되었다. 시내 곳곳에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고, 교통통제를 안내하는 것도 보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응급환자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서 구급대를 전진배치하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 우연은 조직 홍보와 침체된 분위기 전환하기 위해 극한체험을 하자는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이쯤 되면 필연이 아닐까.
내 지역에서 하는 축제임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던 터라 어떻게 할 것인가와 준비물 등에 관한 정보도 찾아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말 그대로 마라톤대회, 다만 알몸으로 뛰는 것이 좀 다를 뿐이었다.
제천은 지역적으로 분지여서 겨울에 유독 추위가 심하다. 일기예보에서 강원 북부지역의 추위보다 먼저 나오는 곳이기도 해서 제베리아(제천과 시베리아의 줄임말)로 불리기도 한다. 칼바람이 부는 날 웃통을 벗고 달리기를 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일이다. 인터넷에는 온통 자신을 알리기 위해 눈에 띄는 보디 페인팅 문자를 쓰고 기묘한 복장을 하고 달리는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우리는 단체로 제복을 입고 달리기로 했다.
당일 아침 기온은 –13도. 오후에는 기온이 올라간다는 뉴스가 나오긴 했지만 만만찮은 추위였다. 페인팅을 위해 옷을 벗는 순간 살에 닿는 바람이 핥고 가는 추위는 잊고 있던 털의 뿌리들이 새싹처럼 돋아났다. 장갑을 낀 손으로 몸을 비비며 외투만 걸치고 가볍게 뛰었다. 몇 백 광년을 달려온 햇살의 따스함이 새삼 고마웠다. 의림지 호수를 타고 불어오는 응달의 찬바람이 출발선의 알몸을 더 조여왔고, 달리는 순간부터 양팔 뚝으로 서서히 결빙되는 물처럼 어는 느낌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심장에서 먼 곳의 기관들은 결빙되어 가면서도 심장은 뜨거웠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약 30분간의 달리기가 평상시의 운동으로 힘들지는 않았고, 새로운 도전에 대한 뿌듯함이 오히려 햇살만큼 나 자신을 뜨겁게 했다.
나이 먹어감에 따른 스스로의 자제와 두려움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지레짐작으로 못하거나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계심의 벽을 허물어 버릴 수 있는 우연한 기회가 오히려 고마웠다.
달리기를 마치고 입었던 외투의 따뜻한 느낌에 안주하지 말고, 몸이 얼어가면서도 한편에서 뜨거움으로 넘쳐났던 우연한 용기냄에 스스로 뿌듯했던 기억으로 이 겨울을 이겨내야겠다. 봄은 그렇게 오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