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혜경 Jul 07. 2024

아무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커피마저 아무맛도 없고.


아니. 발이 시려요?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병원 대기시간은 길었고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옆자리 파마머리를 한 분이 발이 왜 시린지 모르겠다고 했고 같이 오신 분은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었는데 건너편 역시 파마머리를 한 분이 그 얘기를 듣고 반응한 것이다. 아니. 하면서 아예 옆자리로 옮겨 가신다. 같이 오신 분도 말리지 않으신다. 발이 많이 시리세요? 네 많이 시려요. 담뱃잎을 구해다가 푹 끓여서 그 물에 발을 담가봐요. 담뱃잎을 어디서 구한대요. 가만있어봐요. 여기 이 전화번호. 여기로 전화해 봐요. 고마워요. 병원에 진료하러 와서 민간요법을 공유하다니.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랑. 정겹다가도 내가 겪는다면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칠 일이다.      


몇 년 전일이다.

    

눈이 마주쳤는데 그냥 지나쳐서 속상했어요. 네 번째 만남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건 우리의 철칙이에요. 모든 이야기와 관계는 상담실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요. 상담을 끝내고 근처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시키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루틴이 되어가던 때였다. 사람들도 쳐다보지 않고 창가 자리에 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커피가 맛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앉아 있다가 집으로 걸어가곤 했었다. 그날은 유난히 추운 날이었는데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 그녀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어. 눈이 마주쳐서 나도 모르게 하이. 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 내 눈을 피해 빠르게 커피 주문을 하고 빠져나갔다. 모른 척한 건가. 인사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눈인사라도. 서운했다. 그래도 많은 이야기를 나눈 상대라고 생각해서 더 그랬는지 집에 가서도 내내 생각났다. 다음 주까지 기다려야 이유를 물어볼 수 있을 텐데. 그때까지 이 서운한 감정이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바쁜 나날들이 지나고 다시 상담 날짜가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처음 뱉은 말이었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서운한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랬다면 미안해요. 혹시 다음에 만나면 눈인사를 할게요. 나를 누구라고 소개할지 곤란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혹시 설명해야 한다면 상담 얘기도 하셔야 할 것 같고 모든 절차들이 부담된다고 누군가 얘기해 준 적이 있어요. 그 이후부터 상담실 밖에서는 우린 모르는 사이다.라고 저도 생각했나 봐요. 하지만 모두가 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인사를 원하면 할 수 있어요. 서운한 감정이 들게 했다면 미안해요. 의도한 것은 아니에요. 네. 전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좀 전에 만났던 상냥한 사람이 갑자기 돌변한 것 같았거든요. 그런 상황이 오면 누구든지 당황하니까요. 어제까지 친절했던 사람이 오늘 떠났어요. 모진 말을 뱉고요. 견딜 수가 없었어요. 또다시 상담이 시작되었다.     

 

어떤 말인지 얘기해 줄 수 있나요. 문장 전체가 나쁜 말들이었어요. 제 몸이 한 군데씩 잘려나가는 느낌이었죠. 다행인 것은 전화로 했다는 것 정도? 그렇지만 끊을 수는 없었어요. 그랬다간 다시 전화를 걸 테니까요. 전화기를 그냥 저쪽에 두고 듣지 않으면 안 되었냐고요? 모르겠어요. 전화를 받자마자 나쁜 말로 시작을 해서 중간에 다른 말이 나올까 기다렸던 것도 같고 대꾸를 할 수도 없어서 그냥 전화기를 들고 다 들었나 봐요. 자꾸 생각나고 생각하면 아프고 이해가 안 가고. 이 일에 대해서 얘기해 봤냐고요? 아니요. 아마 영영 얘기하지 못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이후로 환청이 가끔 들려요. 아주 길고 더러운 환청이요.

    

그렇다고 관계가 마냥 나쁜 것은 아니에요. 어느 날은 사이가 참 좋아요. 함께 케이크를 먹으러 갈 정도로요. 누군가와 케이크를 함께 먹는다는 건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겠죠?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랑 케이크를 먹으러 가지는 않잖아요. 전 아주 친한 친구 한 명이랑만 케이크를 먹으러 가요. 딱 한 명 있어요. 그 친구와 제가 만나는 건 케이크를 먹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예요. 어느 날은 말없이 한 조각씩 먹고 헤어진 적도 있어요. 그래도 편안했어요. 말이 없어도요. 그런데 그분과 함께 먹으러 갔다니까요. 제가 먼저 가자고 한 건 아니었어요. 약국으로 가는 길에 케이크 가게가 있었는데 별안간. 케이크 먹을래? 하더니 먼저 쑥 들어갔어요. 제가 대답도 하기 전에요. 항상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놀랍진 않았지만, 케이크 집이라 망설여지긴 했어요. 같이 먹기는 아직 어색하고 서먹한데. 말없이 먹었다가는 또 타박을 들을 것 같고요. 그렇다고 말이 하기는 싫었는데. 어쨌든 케이크 한 조각씩을 테이블에 놓고 마주 앉았어요. 먹어봐. 맛있겠네. 처음으로 한 말이었어요. 다정하게 들리더라고요. 정상적인 모녀 관계처럼요. 눈물이 나려고 해서 잠깐 화장실 좀 간다고 하고 일어섰어요. 정상적인 모녀 관계는 이런 말들을 주고받는 건가. 의아하면서 나쁘지는 않더라고요. 좋은데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또 언제 나쁜 말들이 쏟아져 나올지 모르잖아요. 그래도 케이크는 정말 맛있게 보였어요. 화장실을 다녀오니 벌써 반 이상 먹고 없더라고요. 제 것도요. 남이 먹던 케이크를 먹고 싶지는 않아 귀퉁이를 포크로 긁고만 있었더니 이제 갈까. 하더라고요. 전 케이크 맛도 보지 못했어요. 유명한 집이라고 들었는데 저에게는 어둡게만 보이는 케이크 가게였어요. 맛도 모르겠고요. 하루가 이렇게 억울하게 흘러가다니 그리고 집에서도 똑같은 시간이 흘러간다고 생각이니 숨이 막혔어요. 전 들를 곳이 생각나서 이쪽으로 갈게요. 하고 인사를 건네고 빠른 걸음으로 반대쪽으로 걸어왔어요. 딱히 갈 곳은 없었지만, 그쪽으로 걷다 보면 도서관이 나올 테니 이상해 보이진 않았겠죠. 저의 오후는 이렇게 망가져갔어요. 

     

식탁은 4인용이었는데 한쪽 면이 벽에 붙어있었어요. 실제로는 3명만 겨우 앉을 수 있었고 부엌이 좁아 식탁 의자는 늘 접혀서 한쪽에 세워 두었어요. 접이식 의자를 접는 것과 펴는 것은 항상 저의 몫이었지요. 압력솥에 밥을 하면 어느 순간 치익 소리가 나는데 그때가 밥이 거의 다 되어 간다는 뜻이에요. 방에서 책을 보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숙제를 하다가도 치익 소리가 나면 부엌으로 나와 접이식 의자를 하나씩 펴서 어떻게든 4명이 앉을 수 있도록 펼쳐 놓아야 했어요. 저는 항상 모서리에 앉아서 위태롭게 밥을 먹었어요. 막내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4명 중에 그래도 몸집이 제일 작았으니까요. 접이식 의자를 펴다가 손가락이 틈새에 자주 끼었어요. 아팠지만 피는 나지 않았고 피가 나지 않으면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저도 그냥 넘어갔어요. 한 번은 피멍이 들었는데 그때도 아무도 별말을 하지 않았어요. 

작가의 이전글 꿈을 꾸고 꿈을 팔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