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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타조 Feb 16. 2021

고향 가는 길 위에서

감정 들여다 보기

첫 경험과 첫인상처럼, 어린 시절의 경험도 다른 기억보다 더 렷하게 자리기 마련. 명절에 대한 내 기억만 해도 그렇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친척들의 큰 웃음소리, 절하고 살가운 칭찬, 른들이 준 용돈으로 두둑이 채운 호주머니, 사촌 형, 누나와 나눈 유쾌한 농담들, 극장에서 관람하는 개봉 영화의 짜릿, 자유롭게 허락된 오락실 희열, 친척들과 노는 윷놀이와 화투, 부침개와 갈비로 배 채우던 명절 음식들 등등 모두가 넉넉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루한 학교 일정에 단비 같은 소풍날처럼, 명절은 일 년의 평이함 속에서 설레는 날 중 하나였다.




4남매였던 아버지는 둘째였다. 그 때문에 우리 집은 명절 하루 전날에 매번 대구 큰집으로 향했다. 가는 방법도 변했다. 처음에는 귀성객들로 적이는 무궁화호 기차탔다. 가끔 고속버스를 기도 했었고, 형편이 나아지며 아버지 트럭을 타기도 했었다. 큰집은 우리 집에 비해 집 자체가 좋았다. 무엇보다 방이 세 개였다. 커다란 안방에 전축이 있는 형들 방, 그리고 아담하고 따뜻한 사촌 누나의 방도 있었다. 나무 바닥 널찍한 거실은 밟는 느낌도 좋고 달그락 거리는 소리도 좋았었다. 깨끗한 욕조까지 있는 화장실은 우리 집 화장실과 비교되었다. 그럴 때마다, 먼지 가득하고 좁은 시골 우리 집, 나도 큰집 같은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삼 형제의 식구가 모두 모이면, 아이들까지 13명이 된다. 한 자리에 모이기라도 하렇게 넓은 큰집이 가득 차서 북적다. 징검다리처럼 터울을 둔 또래의 사촌 운동장처럼 뛰어다녔어도 이웃집의 불평 한번 듣지 않았던 게 지금 봐도 신기하다. 간혹 어른들 노래자랑을 시키기도 했는데, 나를 포함해 이들은 두 말없이 어른들 앞에 다. 약간의 부끄러움만 감수하면, 주머니 두둑 용돈 챙길 수 있었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사촌 형들의 존재가 좋았다. 대학생  형의 기타를 튕겨보는 기회라던가, 최신가요 테이프, LP음반도 내 마음대로 들을 수 있었다. 동성로 있는 큰 극장에서 최신 영화 관람하는 일도 명절의 백미 중 하나였다.

나이가 들수록 그 느낌들 비록 다르게 느껴졌지만, 내 어린 시절 명절은 분명 가장 즐거운 이벤트였다.


그랬던 명절은 아이들이 성년이 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먼저, 형과 동생들의 말수가 줄었다. 어떤 때는 각자 바쁘다는 이유로 한 두 명씩 오지 않기도 했다. 특히, 대학 진학, 취업 그리고 결혼으로 이어지는 성장의 과정에서 명절은 점점 공평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에게는 여전히 즐겁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스트레스였다. 비교가 문제였다. 자식들의 성적표에 따라 부모들의 표정은 달라졌고, 더불어 자식 세대는 잔소리와 자격지심이라는 불편함을 달고 있었다. 이런 미묘한 감정으로 인해, 어느새 명절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나 스스로도 그랬다. 결혼을 하며 명절은 완전히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다. 아내가 참석하고, 아이들까지도 멤버가 되었다. 더불어 나의 명절 포지션도 변했다. 새로운 우리 가족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 하나 상처입지 않도록 살피고 지키는 일이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의 명절을 보내자, 나의 명절은 더 이상 즐거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명절 즈음이 되면, 그때마다 갈까 말까 와 언제 어떻게 보낼까를 고민해야 했고, 명절 후의 폭풍도 감내해야 했다. 한 동안 명절은 한해 중 가장 걱정스럽고 고단 해지는, 숙제 같은 날이 되어버린 것이다.


혼자 운전대를 잡고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설 전날인데도 고속도로는 뻥 뚫려있었다. 도로 사정도 낯선데, 아내와 아이들 없이 혼자 가는 길이 허전하기만 했다. '그래도 나라에서 가지 말라고 했으니'하는 위안을 하며,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명절들을 떠올리고 있던 참이었다.

"엄마에게 여태 이런 말을 못 했지만, 이 자리를 빌려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어요."

즐겨 듣던 라디오에서 청취자의 사연 하나가 귀에 들어왔다. 올해 언택트 설날이라 라디오의 코너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가족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하던 사연을 DJ가 대신해서 전화로 전달해 주는 방식이었는데, 그중 이십 대 후반의 아들이 엄마에게 하는 감사의 고백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일찍 돌아 가시는 바람에 엄마가 많은 고생을 하셨고, 특히 요즘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는 엄마가 많이 걱정된다고 했다. 아들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며, 사랑과 고마움을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모자간의 따뜻한 관계가 귀에 속속 박혔고, 나도 울컥해졌다.


어른이 되고도 한참 지난 나이에 명절이 무슨 의미일까 싶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매번 눈치 보고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았었다. 낯선 시댁의 스트레스와 심신의 노동이 더 많았을 아내에게도 미안하고, 사촌이라고는 달랑 한 명뿐이고 그 마저도 잘 만날 수 없는 터라, 아이들에게도 명절은 아쉽기만 하다.


돌아오는 명절은 매년 그대로인데, 내가 받은 느낌세월과 함께 변해왔.




결국, 라디오가 외롭게 운전하던 나를 위로한 셈이었다.

오늘은 설렘으로 가득했던 명절이 아니라, 장성한 아들의 귀향 컨셉으로 바꾸었다. 또한, 어린 날의 설렘이 아니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 할 일이 떠올랐다.

'내가 명절에 말했던 적이 있었나? 그렇다면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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