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바람 Oct 23. 2019

#8 시아버지의 8.31 선언

호주 출장 때문에 7월에는 거의 저축을 하지 못했다.

"우리 당분간 진짜 아껴 써야 돼."


남편과 굳은 다짐을 하고 8월을 시작한다. 하지만 줄일 수 없는 지출 항목이 있다. 바로 가족 행사다. 사촌 여동생네 돌잔치가 있고, 새언니가 둘째 아들을 출산한다. 마지막으로 양가 아버님의 생신이 있다. 우연하게도 두 아버님의 생신이 같다. 그건 곧 두 배의 지출을 의미한다. 이번 달에도 저축은 어려워 보인다.


시부모님은 대전에 사신다. 주말에 내려가려고 했는데, 기다려보라고 하신다. 시아버지의 근무 스케줄이 확정되지 않아서 수요일까지 기다린다. 그런데 갑자기 토요일에 서울에 올라오시겠다고 한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냉장고를 파먹고 있었는데, 이제 반대로 준비해야 한다. 시부모님의 기차표를 예매하고, 호텔 뷔페를 예약한다. 그리고 나는 매일 조금씩 장을 본다. 일요일 아침에 시아버지의 생신상을 차려야 하는 것이다. 긴장된다.




토요일 오전부터 집 청소를 한다. 제일 신경 쓰이는 건 화장실이다. 화장실 변기를 싹싹 닦고, 너저분한 샤워 용품을 치운다. 냉장고에는 새로 사 온 음식을 채워 넣는다. 그리고 미역국을 끓여 놓는다. 내일 새벽에 아침상을 차려야 하므로 시간이 걸리는 것들은 미리 준비한다.


오후 5시에 강남의 한 호텔에서 모이기로 했다. 시누이가 서울역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온다. 몇 달 만에 본 시아버지는 홀쭉해지셨다. 여름에 땀을 많이 흘리셔서 4kg이 빠지셨다고 한다. 나의 새해 목표가 3kg 감량이었는데, 나는 1년이 걸려도 못해낸 걸 시아버지는 두 달 만에 해내셨다.


호텔 뷔페는 만족스럽다. 종류도 다양하고, 맛이 좋다. 귀한 손님을 모실 때 한 번씩 오는 곳이다.


“소주는 없냐?”


시아버지가 호텔 뷔페의 유일한 단점을 찾아내신다. 와인이 무한 제공되고, 생맥주 1+1 이벤트를 하지만 의미 없다.


“아버님, 여기 있습니다.”


나는 미리 준비해온 텀블러를 가방에서 꺼낸다. 좋은 안주를 보면 소주가 당길 거라던 엄마의 예상이 맞았다. 텀블러에 든 소주를 시아버지의 와인잔에 따라드린다. 회와 갈비, 바닷가재 안주에 소주를 드신 시아버지는 기분이 좋아 보이 신다. 어느 정도 식사가 진행되고 나서, 시아버지가 말씀하신다.



내가 지금부터 중요한 얘기를 할 테니까 잘 들어라.
이번 추석부터 우리 집은 차례를 안 지내기로 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명절은 각자 편한 방식으로 보내자.
나는 낚시나 다니련다.


시가에서는 큰어머니가 차례상을 도맡아오셨다. 그런데 이번 추석부터 그만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셨다고 한다. 일종의 맏며느리 사표다. 사실 궁금하긴 했다. 큰집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큰집에 들어서면 조각상부터 액자까지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들이 가득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기일에도 추도 예배를 지낸다. 그런데 설과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는 게 어색해 보이긴 했다. 마침내 큰어머니가 30년간의 종교적 모순을 해결하기로 하신 것이다.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시아버지의 말씀에는 중요한 지침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8.31 선언’이라 명명하기로 했다. 선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설, 추석에는 전날이나 당일에 내려오지 않아도 좋다. 친정에 먼저 다녀와도 된다. 명절 전후로 편할 때 와라.


2. 꼭 자고 가지 않아도 된다.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가도 된다. 잘 거면 근처 모텔이나 호텔에서 편하게 자라.


3. 내년부터 시부모님 생신은 시어머니 생신으로 통합해서 한 번만 챙긴다. 여름휴가 기간이므로 주말에 펜션을 잡아 1박 2일을 보낸다. 음식은 맛집에서 외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4. 큰집과 작은집에는 찾아뵙지 않는 대신 명절 선물을 보낸다.


5. 남편의 회사에서 보내주는 굴비 세트는 양가에  한 번씩 번갈아 보낸다.


6. 시조부모님의 산소는 일 년에 두 번 찾아뵙는다. 막걸리, 과일, 포 등을 간단하게 준비한다.

7. 시조부모님의 기일이 주말이면 참석한다.


이렇게 쿨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쿨내가 진동한다.

이 선언의 요지는 ‘효도를 강요하지 않는다’이다. ‘며느리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한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시가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다. 연말 나훈아 콘서트 표를 선물해드리고 싶어 진다.


“지난번에는 아들네 집에서 잤으니까 오늘은 딸네 집에서 잘란다. 나가서 간단하게 맥주나 한 잔 하고 헤어지자.”

“저... 사실은 두 분이 저희 집에서 주무실 줄 알고 음식을 조금 준비해놨어요. 괜찮으시면 2차는 저희 집에서 하시겠어요?”


술은 우리 집에서, 잠은 형님네서 주무시기로 한다. 형님네 가족은 차로, 시부모님과 우리는 택시로 이동한다. 다행히 우리가 먼저 도착한다. 부랴부랴 부엌에 가서 술상을 차린다. 일요일 아침상이 저녁 술상으로 전환된다. 미역국과 문어, 연어와 광어회, 전복, 무화과, 포도, 오징어, 쥐포 등으로 재빨리 술상을 차린다.


“다음부터는 힘들게 준비 안 해도 된다. 이제 피곤하니 딸네 집에 가서 자야겠다.”


시부모님과 시누이 가족이 밤 10시가 되기 전에 일어난다. 남편과 함께 상을 치우고 잠자리에 든다. 이상하게 하나도 힘들지가 않다.




일요일 아침 6시 반에 남편이 일어난다. 주말인데 일찍 일어난 그가 낯설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몰라. 눈이 떠졌어.”


일어난 김에 관악산 둘레길을 걷자고 제안한다. 남편이 투덜대면서도 따라나선다. 둘레길을 걷다 보니 잠이 깬다. 이상하게 컨디션이 좋다.


“자기야, 렌터카 빌려서 시부모님 서울역에 모셔다 드리고 오자.”


나의 자발적인 제안이다. 오전 9시에 시누이네 집 앞에 도착한다. 시부모님이 우리를 보고 활짝 웃으신다. 차에 타서 시아버지가 들뜬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아들이 낫구먼. 딸은 데려다준다는 소리가 없어서 택시 타고 가려고 했다. 아침이라고 누룽지를 주는데 반찬은 달랑 김치 한 가지더라. 며느리가 끓인 미역국이 훨씬 맛있다.”


모시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역 앞에서 시부모님을 배웅해드린다. 뿌듯하다. 두 시간 뒤, 시어머니가 잘 도착했다고 나에게 전화하신다.




이틀 뒤, 시아버지가 전화하신다.


“며늘아, 추석에는 어떻게 하기로 했니? 그래도 명절인데 밥은 한 끼 먹어야지?”

“네, 아버님. 이번에는 저희 시골에서 차례 먼저 지내고 추석 당일 점심에 대전으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남편과 대화한다.


“아버님 귀여우시다. 우리가 진짜로 안 올까 봐 걱정하셨나 보다. 그런데 어머님이랑 아버님이 왜 자기가 아니라 나한테 전화하시지?”
“자기가 요직이니까.”
“내가 리더인 거 눈치채셨나?”


시가의 쿨함에 나도 덩달아 쿨해진다. 명절이 의무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되자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 한 해는 시가와 여행을 가고, 이듬해는 친정 식구들과 여행을 갈 수도 있다. 신정은 시가에서 보내고, 구정은 친정에서 보낼 수도 있다. 또는 양가 방문을 생략하고 둘이 여행을 갈 수도 있다. 어쩌면 큰 변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상의 자유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이전 07화 #7 시어머니와의 2박 3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