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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Oct 23. 2019

#9 남편이라 주는 선물

우리 부부는 작년 5월에 만나서 11월에 결혼했다. 남편의 생일은 9월이라 유럽 여행과 추석 사이에 끼어 있었다. 유럽 여행 전에 신혼집을 계약했고, 추석 때 결혼 허락을 받았다. 이사와 결혼이라는 거대한 이벤트 앞에서 남편의 생일은 작아졌다.


신혼집에 들러서 공사 현장을 확인하고, 저녁을 먹는 것으로 간단하게 생일을 보냈다. 그때 내가 준 선물은 엉뽕 팬티였다. 남편이 엉덩이가 없어서 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났다. 남편의 생일선물은 처음이라 고민된다. 이런 내 고민을 알아챘는지 남편이 카톡으로 링크를 보낸다.


“흰 운동화가 없어. 나 이거 사줘.”


원하는 걸 말해주니 고맙다. 생일에 맞춰서 도착하도록 주문한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결혼 후 ‘첫 생일’이라 뭔가를 해줘야 할 것 같다. 뭐가 좋을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결혼 전까지 남편은 비타민도 안 챙겨 먹을 만큼 건강에 무관심했다. 우루사 하나로 버티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눈가가 자주 떨려서 마그네슘을 챙겨줬다. 두어 달 지나니까 증상이 사라졌다. 홍삼을 챙겨 먹이니 피곤하다는 소리를 덜 한다. 역시 몸은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


하지만 언제, 어디가 아플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편은 어떤 보험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다. 그 사실을 결혼 후에 통장 관리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번 생일에는 의미 있게 ‘보험 증서’를 선물하기로 마음먹는다.


엄마에게 아는 설계사가 있는지 묻는다. 다음 날 오후, 매장에 엄마 친구가 와 계신다. 역시 이 방법이 제일 빠르다. 실비 보험만 들려고 했는데, 종합 보험도 괜찮아 보인다. 2가지의 보험 설계 내용을 파일로 받아서 저녁에 남편과 검토한다.


생일 전에 계약을 끝내고 싶어서 다음날 저녁에 강남역에서 설계사와 만난다. 아이패드에 서명을 하면서 한참을 진행하는데, 설계사가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난색을 표한다. 전자청약 서면 동의서가 필요한데, 그 문서를 안 가지고 오셨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내일 오후에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한다.



오늘은 남편 생일이다. 저녁때가 되자 사무실에 설계사가 온다. 보험 계약은 상당히 귀찮은 과정이다. 빨리 끝내고 싶다.


“오늘은 서면 동의서 잘 챙겨 오셨지요?”

“응, 챙겨 왔지. 내가 요즘 깜빡깜빡하네.”


아이패드에서 전자 청약 절차를 시작하려는데, 이번에는 패드 전용 펜이 없다고 하신다. 가방을 쏟아서 다 찾아봐도 없다. 다음 주에 다시 오신다고 한다. 나는 아줌마를 붙잡고 말한다.


“그냥 손톱으로 해볼게요.”


생일 선물은 당일에 줘야 의미가 있다. 손톱으로 한 칸 한 칸 서명한다. 한 시간이 훌쩍 넘어서 모든 절차가 끝난다. 이제 남편은 실손 보험과 건강 보험에 가입되었다. 암, 뇌졸중, 급성심근경색, 요양병원 입원, 중환자실 입원, 성인질환 등의 경우에도 보장을 받을 수 있다.


남편은 올해 37살이다. 뇌졸중, 요양병원 같은 단어들과는 아직 먼 나이다. 하지만 20년간 건강 보험을 납부하고 나면 57세다. 보험 가입은 ‘당신이 늙고 아파도 나는 당신 옆에 있을 거예요.’라는 나의 메시지다. 남편도 든든해하는 눈치다.


미래를 준비했으니 맛난 걸 먹을 시간이다. 엄마와 오빠까지 넷이서 소고기를 먹는다. 따로 준비해온 쇼핑백을 꺼낸다. 집업 점퍼와 맨투맨 티셔츠다. 간절기 필수 아이템이다. 오늘 외근을 갔다가 쇼핑몰에서 세일을 하길래 덥석 사 왔다.


그리고 오빠가 뜻밖의 선물을 한다.


“새언니가 사준 백팩인데, 너무 슬림해서 나한테 안 어울리네. 기훈이가 한 번 메 봐.”


오빠한테는 작아 보이던 가방이 남편 등에는 잘 어울린다. 오빠가 쿨하게 가방을 남편에게 준다. 남편이 감사하다며 선뜻 받는다.


집에 와서 내가 사준 티셔츠에 점퍼를 입고, 오빠가 준 프라* 백팩을 메고, 흰 운동화를 신어 본다.


“풀 착장 하니까 대학생 같아. 잘 어울린다.”

“고마워, 다 너무 마음에 든다.”

“그중에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

“솔직히 말해도 돼? 형님이 준 백팩! 등에 아주 착 감기네, 헤헤.”

“자기도 명품에 마음이 가는 걸 보니 속물이구나?”

“헤헤, 맞아. 나 사실 속물이야.”

“괜찮아, 나도 속물이야.”


남편이 활짝 웃는 걸 보니 생일을 잘 챙겨준 것 같다.

환갑에는 뭘 선물해줄지 천천히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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