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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선 May 29. 2023

공황장애 때문에 내 인생이 틀어진 이유

INFP의 직장생활 극복기 1

남들 다 하는 직장 생활이 내게는 참 어려웠다. 첫 회사는 강남에 위치한 모 스타트업이었다. 대표님과 대표님 친구, 나 셋이서 일했다. 생전 얘기를 나누어 볼 일도 없었던 10살 이상 차이나는 남성들과 부대끼며 생활하려니 매일이 고역이었다. 어떤 대화를 나누어야 할지, 어떤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5개월쯤 다녔을 때 사건이 발생했다.



6시에 칼 같은 퇴근을 하고 친구를 만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그날은 실연당한 친구를 위로해 주러 모이는 날이었다. 그런데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부터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배가 고파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 그때 나는 다이어트를 핑계로 회사 사람들과 따로 밥을 먹었기 때문에 약간은 허기진 상태였다. 버스에서도 어지럼증은 계속됐다. 노래도 듣기 힘들어 이어폰을 뺐다. 버스에서 힘겹게 내렸을 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 철퍼덕 앉았다. 결국 친구를 불러 S.O.S를 남겼다.


부축을 받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회포를 푸는 날인 만큼 도착한 곳은 술집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곳은, 인도에서 계단이 바로 이어지는 2층에 위치해 있었다. 어두침침한 분위기에서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니 반가웠다. 뜨끈한 어묵탕과 식사 종류를 주문하고 수다를 떨었다. 푸짐한 음식이 식탁을 가득 채웠다. 어지럼증엔 밥이 약이지! 다소 한국인스러운 생각을 하며 국물을 입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던 어지럼증이 더욱 심해진 것이다. 심지어 호흡곤란 증세가 동시에 찾아왔다. 결국 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119 좀 불러줘."


처음 겪는 상황에 친구들은 당황했다. 내 몸은 어느덧 의자에서 떨어져 있었다. 친구들도 놀라고, 사장님도 놀라고, 주변 사람들도 놀랐다. 사장님은 황급히 테이블을 밖으로 옮겨 주셨다. 나는 편안하게 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숨을 쉬기 어려웠다. 더불어 온몸이 마비되었다. 손과 발이 안으로 곱고, 머리와 입천장까지 마비가 되었다. 그때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식물인간이 되는 것일까. 나는 아직 하지 못한 것들도 참 많은데. 그때의 나는 누구보다 꿈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믿지도 않는 하늘을 탓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났다. 웬 사람들이 우르르 내 자리에 몰려왔다. 여자분이 내게 무어라 속삭였고, 남자분은 내 발을 주물러 주었다. 그때의 내게는 그분들이 전부였다. 조금 진정이 되자 몸을 일으킨 나는 바닥에 앉았다. 여전히 호흡은 고르지 못했다. 지금 가장 생각나는 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당신이라고 답했다. 누구시냐고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냥 관련 일을 하는 분이라고 했다. 나는 한층 안정이 됐다. 상황이 마무리될 때쯤 119 구조대원이 도착했다. 과호흡이라고 했다. 어차피 병원에 가도 해줄 것이 없으며, 비싸기만 하다는 그분들의 말에 응급실 대신 집에 가기로 했다. 그때는 아이폰의 페이스 아이디 기능이 없었다. 친구는 내 핸드폰을 꺼내 내 검지손가락으로 잠금을 풀었다. 엄마에게 전화해 와 달라고 얘기해 주었다. 힘없이 가방을 싸며 엄마를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집으로 향하지 못했다. 다시금 증상이 나타난 것이었다. 결국 119에 재차 전화하고 난생처음으로 구급차를 타보았다. 응급실에는 보호자가 한 명밖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드라마에서는 여러 명이 보호자랍시고 들어가던데, 드라마적 허용이었나 보다. 잡다한 생각을 하며 누워있자 엄마가 도착했다. 엄마가 나가자 아빠가 들어왔다. 안정제를 맞고 나서 나는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은 회사에 가지 못했다. 다다음날 다시 출근을 했다. 그런데 나는 중간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에서 과호흡 증세가 발현돼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기 때문이다. 아침의 고속도로가 막힌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그 뒤로 나는 광역버스를 타지 못하는 병을 얻게 되었다. 이는, 그 회사에 출근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내 삶의 계획이 모두 무너졌다. 나는 이미 내일채움공제를 2달째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취소를 할 수도 없었다. 돈을 모아서 2년 후에 유학을 가는 게 목표였던 나는 크나큰 실패를 맛보았다.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방황의 20대를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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