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자이언츠에서 제 역할은 5할 직관 타자입니다.
그가 갑자기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손가락 4개를 펼쳤어요.
이건 그 유명한 4달라?
모 햄버거집에선 4달라가 맞겠지만, 야구에선 고의사구를 의미합니다. 이 선택을 한 건, 롯데 자이언츠 김태형 감독입니다.
2023년 4월 2일,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펼쳐진 롯데 자이언츠 경기입니다. 선발투수가 6이닝 4피안타 3볼넷 10탈삼진 무실점의 기록을 세웠고요. 0대 0의 접전에서, 롯데 레이예스가 출루하고, 대주자 황성빈으로 바뀐 뒤, 황성빈이 1루에서 2루, 2루에서 3루로 연속 도루에 성공합니다. 이후 손호영의 안타로 1:0으로 앞서나갑니다.
9회 말, 롯데의 마무리 김원중이 등판했습니다. 잘 막아낼 줄 알았지만, 그건 우리 꿈이었던 걸까요? 선두 타자에게 6구 승부 끝에 볼넷을 내주고, 대타에게 좌측 깊숙한 2루타를 맞으며 아웃카운트 하나 없이 2, 3루가 되어버립니다. 쉽게 말하자면, 저 멀리 공을 두 번 보낸다면, 2아웃은 되겠지만 2점을 얻어 한화가 이길 수 있는 상황이란 거예요. 롯데엔 패배가 거의 확정적으로 다가온 순간입니다.
그 순간, 김태형 감독이 손가락 4개를 펼쳤고, 고의사구 작전을 쓴 겁니다. 아웃 카운트가 없는 2, 3루 상황에서 만루로 바뀐 거죠.
왜 이런 작전을 쓰는 거냐고요? 이를 이해하려면, 포스아웃, 태그아웃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포스 아웃 : 수비수가 글러브나 손에 공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베이스를 터치해 아웃
태그 아웃 : 수비수가 글러브나 손에 공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주자 신체에 접촉해 아웃
태그 아웃은 언제든지 성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스아웃은 오로지 타자와 주자가 진루해야 하는 상황에서만 성립 가능해요. 이게 뭔 말이냐면, 주자가 2루에 달랑 혼자 있다? 이땐 타자가 안타를 치고 1루를 올 수 있는 상황이니, 태그아웃만 가능한 거죠. 만약 주자가 2, 1루에 있다? 타자가 안타를 치고 1루로 나아가면, 나머지 주자들은 1루에서 2루로, 2루에서 3루로 나아가야 하는 게 필수예요. 이때는 포스아웃, 베이스만을 터치해 아웃 가능하다는 거고요.
https://blog.naver.com/movie_damda/223282686374
쉽게 얘기하자면 주자가 없을 때, 1루에 주자가 있을 때, 1, 2루에 주자가 있을 때, 1, 2, 3루에 주자가 있는 만루 상황일 땐 베이스 터치로 아웃이 가능합니다. 공을 잡고 몸에 접촉해 아웃 하는 거보단 베이스 터치를 통한 아웃이 빠르기에, 김태형 감독은 2, 3루 상태가 아닌, 일부러 1루를 채워 만루로 만든 거죠. 포스 아웃으로 이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2, 3루 상황에서 한화 타자 이재원을 고의사구로, 1루로 내보냅니다.
문현빈, 페라자, 채은성의 막강한 중심 타선을 상대로 싸우기로 한 거니까요.
솔직히, 전 이거 못해요. 잘 치는 애를 상대하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문현빈 타석.
김원중이 공을 던졌고요.
타격합니다.
땅볼이고요.
이 땅볼을 잡고 홈 베이스를 밟고 있던 포수에게 송구합니다. 1아웃
포수는 1루 베이스를 밟고 있는 1루수에게 공을 던지네요. 2아웃
와우, 병살을 해낸다고?
무사 2, 3루에서 2아웃 2, 3루가 되면서 롯데 팬들은 기대하기 시작합니다.
설마 이거 이길 수 있을까?
그 순간, 우리 태형이 형님은 또다시 손을 들어요. 고의사구!
저한테 하라면 전 절대 못 해요. 정말로요. 앞에는 강심장이었다고 쳐요. 근데 두 번째 선택은 강철 심장 아닌가요? 심장이 단단해도 너무 단단한 거 아닌가요? 저라면 포기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렇게 페라자를 고의사구로, 1루로 보내며, 2아웃 만루가 되고요.
이번 상대는 채은성입니다.
첫 번째 공, 볼
두 번째 공, 헛스윙
세 번째 공, 헛스윙
네 번째 공, 볼
그리고 다섯 번째 공…….
헛스윙. 삼진.
이렇게 2024년 초반에 매우 강력했던 한화 이글스의 8연승을 저지하며, 롯데 자이언츠는 승리를 거둡니다. 참고로, 노아웃 2, 3루 때 한화의 승리확률은 네이버 기준 74.1%입니다.
2023년 10월 20일 총액 3년 24억 원으로 롯데 자이언츠 21대 감독으로 선임된 김태형 감독. 2015년부터 2022년까지 약 8년간 두산 베어스를 지휘하여, 정규시즌 우승 3회, 준우승 1회, 포스트시즌 우승 3회, 준우승 3회를 만든 명장 중의 명장이죠. 그가 고의사구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요?
"9회 말 무사 2, 3루 상황이 되면서 김원중이 초구로 100% 포크볼을 던질 것 같았다. 툭 건드려서 내야 땅볼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초구는 기다려봤다“
"타자는 주자 2, 3루 상황과 만루 상황은 심리적으로 다르다. 아무래도 타자 입장에서는 주자 2, 3루 상황이 더 여유가 있다. 운 좋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사실 고의 4구로 내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초구부터 고의 4구를 지시하려고 했는데 이재원이 초구를 잘 치니까 내야 땅볼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https://www.spotv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69759
김태형 감독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명확한 철학이 있었어요. 명장은 역시 다릅니다.
드리님이 말하신 것처럼 우리 롯데 자이언츠는 정말 다양한 역할의 선수들이 있죠. 올해의 주장 전준우 선수.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는 공격의 핵심 손호영. 점점 성장하며 멋진 미래를 보여줄 거라 기대하는 윤동희 선수, 마성의 남자 황성빈, 나오면 뭔가 해줄 거 같은 정훈 형님, 그는 감히 빛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KBO 타격왕 빅터 레이예스 등. 더 많지만 여기까지 말하겠습니다. 수많은 선수와 위에서 언급한 명장 김태형 감독, 코치진, 프런트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기에 팀이 굴러갈 수 있었습니다.
저도 저의 역할이 있지요. 사직 야구장에선 직관 전문가로서 나름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제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믿지 못하는 분들이 계셔서, 이번에 직관 승률을 한번 정리했습니다.
2024년 9월 4일 기준 59전 30승 27패 2무. 타율로 따지면 5할 타자이네요? 저는 생각보다 괜찮은 직관 전문 타자입니다. 기아, 키움, KT 위즈 등에겐 강하며, 그 이외 나머지 팀에겐 좀 약합니다. 삼성 라이온즈는 직관 가면 안 될 거 같은 성적이네요. 단 한 번 밖에 이기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화 이글스만큼은 직관 6전 6승입니다. 이상하게 한화를 상대하는 롯데 직관만 가면 이기더라고요.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드리님께 제가 쓴 기사(?)를 보냈던 거 기억나십니까?
[속보] 한화 직관 전적 4전 4승 주니, "화목 잡고 6전 6승 이뤄 롯데 가을야구 해내겠습니다."
[속보] 한화만 만나면 이긴다? 결국 또다시 승리하며 5전 전승한 관중 주니. "나는 아직 배고프다. 밥도 먹고 싶지만, 가을야구도 맛 좀 보고 싶다. 목요일에도 직관 가서 가을야구 이루겠다."
[긴급 기자회견] "6연승? 껌이죠. 제가 가기 때문입니다." 독수리를 잡아먹겠다고 선포한 관중 주니. 금일 한화전 6연승 도전을 선포하다!
[긴급 속보] 스치기만 해도 이기게 한다? 관중 주니, 직관 5연승 및 한화전 6전 6승 0패 결국 이루다. "비가 온다고 감히 집에 갔습니다. 제가 안일했습니다. 하마터면 질 뻔했습니다. 하지만 롯데 자이언츠에서 저에게 우산과 치킨을 주셨다면 전 남았을 겁니다. 이 모든 건 롯데의 잘못(?)입니다"
한화 팬들에게 먼저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 제가 가기만 하면 이기게 되는 이 마법을 제대로 증명하고자, 9월 13일, 14일, 15일 3일 연속 한화와 롯데의 경기를 보러 가기로 했습니다. 설마 9전 9승 0패를 하겠습니까? 설마요? 드리님. 제가 만약 이걸 해내면, 롯데 자이언츠는 저에게 무료 티켓을 줘야 한다고 봅니다. 아닌가요? 물론, 삼성과의 직관은 앞으로 좀 자제하고요.
혹시 책 [폴리매스]라고 아십니까? 폴리매스는 어떤 종류의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인데요. 간단하게 정의하자면 이렇습니다.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영역에서 출중한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들.
좀 더 풀어보자면, N잡 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한다는 게 나쁘지 않죠. 그들을 전문가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마냥 한 우물만 깊게 파는 게 아니라,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분야를 세 가지 이상 해내며 새로운 미래로 끊임없이 나아가고 발전하는 이가 되는 것. 그거 또한 괜찮아 보이지 않나요? 저는 책 [폴리매스]를 읽고 제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랑 일맥상통해서 놀랐습니다.
과거의 일들을 기억으로만 흘리기 싫어서 글을 썼었고요. 응급의학과 남궁인 선생님처럼 멋진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걸 전 2022년에 이뤘습니다. 의사 출신의 안철수, 박경철 선생님처럼 청춘 강연하는 걸 꿈꾸다, 친구와 함께 강연가로 도전했었고요. 저는 제가 가진 능력과 함께 말과 글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폴리매스와 같은 삶을 추구했고요.
드리님의 이번 글을 읽다가 울컥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정말 공감하거든요. 저는 막내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대학원에 들어가니, 120명 중 100명이 저보다 형, 누나였거든요. 나중에 직장에 들어가니 막내에서부터 시작했고요. 온갖 업무를 다 처리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두렵습니다. 저 역시 리더가 되고 싶지만 무섭습니다. 리더라는 건 책임을 진다는 걸 의미하니까요. 관중으로선 돈을 내기에 좀 더 편하게 야구를 보고, 내가 얼마나 직관 승리를 하는지 웃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감독은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기에 그럴 수 없잖아요? 그 또한 팀의 성적을 내야 하는 ‘책임’을 가지는 리더니까요.
그렇지만 기대도 됩니다. 막내를 철저히 겪어보고, 막내와 리더 사이를 조율하며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중간자를 거친 뒤, 책임을 지는 리더에 도달한다? 그때마다의 역할에 얼마나 가슴을 두근두근하며 살아갈까요? 지금 위치에 주어진 일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막내 역할에 익숙해졌다는 건 이미 한 역할에 대해 완벽히 숙지했다는 걸로 들립니다. 그보다 윗사람이 된다면 아랫사람을 이해하기 쉽다는 뜻이 아닐까요? 막내 직원에게 업무를 부여할 때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봅니다. 드리님은 이제 중간자가 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저 역시 막내, 중간자, 리더의 역할을 제대로 책임지고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거기다 궁극적으로 원하는 폴리매스까지! 직업적 역할마저 완벽히 해낼 수 있는 이가 꼭 되려고 합니다. 살면서 그 정도 포부는 가지고 살아야죠. 맨날 롯데 자이언츠 우승만 바라지 말고, 제가 멋진 사람이 되고 나서 자이언츠한테도 큰 꿈을 꾸라고 잔소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미숙합니다. 제가 가진 역할 전체적으로 말이죠. 야구장에선 패배하면 슬픈 관중입니다. 집에선 효도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만 하다가 결국 속을 썩이고 마는 아들이고요. 친구들과는 서로 ‘어휴, 저놈은 언제 철이 들까’하는 아직도 어린 녀석이기도 하지요. 물론 사회적 코스프레는 나름 잘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거기다 직장에서의 역할은 두말 나위 할 것 없이 부족하고요.
참고로, 야구 직관이라는 분야는 프로이지만, 야구라는 게임에서 선수로서 뛰어본 경험은 없습니다. 직관은 그렇게 많이 했으면서, 정작 야구를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다니! 문득 잘못(?) 되었단 생각이 들어, 야구선수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친구들과 스크린 야구장을 찾아갔습니다. 롯데 자이언츠 VS 롯데 자이언츠 VS 롯데 자이언츠. 어마어마한 대결이었습니다. 상대가 삼진당할 때마다, 요새 유행인 삐끼삐끼를 틀고 추며 기뻐했죠. 7회 동안 안타가 무려 11개가 나왔습니다. 저 혼자 11개가 아니라, 총합 11개입니다. 거기다 0 대 0 대 0의 결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회당 3번의 타석, 3팀, 7회이니 삐끼삐끼를 무려 63번을 출 수 있었군요. 프로의 야구는 쉽지 않을 거라는 걸 몸소 배우는 시간이었으며, 저의 기운과 야구장 방문이라는 값을 지불하며 롯데를 돕겠다고 다짐한 순간입니다. 야구, 어렵습니다. 보기도 어렵고, 제가 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꽤 긴 편지였지만, 아직 마무리를 지을 수 없어요. 마지막으로 드리님께 묻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죠. 드리님은 그래서 꿈이 뭘까요? 어떤 걸 이뤄내고 싶으신가요? 취미를 다양하게 하는 드리님. 야구를 가볍게 즐긴다고 하지만, 은근 헤비하게 즐기면서 저를 방패막이로 삼는 드리님, 회사 생활을 철저히 해내는 드리님, 열정적으로 강연을 하던 드리님. 그런 드리님이 원하는 미래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보면, 역할 그 이상을 알고 싶어 물어봤습니다.
이제 진짜 마무리하겠습니다. 저희는 9월 13일 금요일, 6시 반, 사직 야구장에서 만납니다. 저는 지각이란 걸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2023년에 이미 전적이 있었던 만큼 1시간 전에 미리 도착할 예정입니다. 드리님도 가능하면 빨리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야구도 좋지만, 맛난 거 먹으며 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나누는 걸로 하시죠.
그날 뵙겠습니다.
드디어 야구장에서 보기로 결정되어 기쁘기만 주니 킴 드림.
[이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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