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wn Sugar - D’Angelo
제가 딱 보니까 블랙학생도 우리 동아리의 멤버가 될 자격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이 노래 한 번 들어봐요. 이 노래가 좋으면 우리 멤버야.
’이게 무슨 소리? 여긴 어디지?‘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세차게 뒤흔든다. 주위를 둘러본다. 호프집이다. 젠장. 많이 마셨다. 머리가 어지럽다.
“뭐해요~ 얼른 들어보라니까?”
앞에 있는 한 남자 선배는 iPod을 내민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그에 손에 쥐고 있는 iPod에 달린 이어폰이 대롱거렸다. 아까 호프집으로 출발하기 전, 동아리회관 건물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남자 선배였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불렀다. 그 선배의 이름은 A였다.
나는 쭈글거리며 A의 이어폰을 받았다. 끄응.. 약간 엉킨 것 같다. 조심조심 풀어낸다. 가만있어보자.. 이 쪽이 왼쪽이다.
낯선 스타일의 음악이 귀를 침투해 들어온다. 이 보컬 스타일.. 언젠가 한 번쯤 아빠가 트는 옛날 팝송들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어폰 속의 가수는 노래를 시작했다. 강약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노래를 불러나갔다. 나는 그 가사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게 돼버렸다. 독보적인 음색과 리듬감. 그의 목소리가 만드는 리듬감이 내 가슴을 펄떡이게 했다.
”와 쩐다..“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온다. 마치 음악이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
"것봐 내가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
A가 웃으며 기뻐한다.
나는 그날 A를 처음 만나 새로운 음악 세계에 발을 디뎠다. 아직 손을 호 불면 입김이 날만큼 추운 3월 중순, x대 재즈밴드 동아리의 신입생 환영회였다.
“블랙아 우리 글 써볼래?”
작년(2024) 어느 여름의 주말, 문래동의 맥주 바에서 A형은 나에게 그렇게 제안을 해왔다.
“글이요? 갑자기요?”
나는 의아해서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일에는 법원에서 일하는 판사로서, 주말에는 노래하는 가수로서 바쁘게 살던 A였다. 거기에 최근엔 운동도 열심히 하기 시작한 지 좀 됐단다. 어휴 지독히 부지런한 사람. 학교 다닐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어라? 옆에 있는 거울을 보니 운동한 티가 난다. A형이 나보다 4살 형이지만 어째 얼굴은 내가 A형보다 더 형 같다. 이미 충분히 바빠 보이는데, 또 다른 걸 해보고 싶다고..?
“응 너랑은 같이 쓸 수 있을 거 같아. 소설 얘기 한 번 들어볼래? “
듣다 보니 스토리가 재밌다. 써보고 싶은 의욕이 뿜뿜. 그렇게 A형은 나의 첫 번째 글쓰기 공동 작업자가 되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꾸준히 글을 썼다. 그가 글쓰기 일정의 리듬을 적당히 조절했다. 내가 지칠만 하거나, 너무 바쁘면 여유를 주었다. 그러니 나는 굳이 글쓰기를 멈추지 않아도 됐다. 포기하지 않고, 즐기는 선에서 꾸준히. 그가 세운 공동작업의 기준은 그랬다. 그렇게 일 년 넘는 기간 동안, 누구에게도 공개한 적 없는 글들이 적혀 내려가기 시작됐다.
얼마 전, 함께 쓰는 소설의 2부가 끝나갈 즈음 그를 문래동에서 다시 만났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면서 서로의 글에 대해 피드백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 글에 대한 피드백이 많았다. 나는 괜히 지적받는 것 같다는 마음이 들어 자존심이 상했다.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 문장들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우리의 글쓰기와는 상관없는, 팀워크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 덩어리들이었다.
"그래 그럴 수 있겠다. 근데, 끊어서 미안한데 일단 우리 중요한 얘기부터 먼저 해보자. ”
A는 상황을 적절하게 정리했다. 예전 같으면 화를 냈을 그였다. 그러나 A는 내색 않고 차분히 대화를 맺고 끊었다. 문득, 그가 새삼 달라 보였다. ‘저 형 내가 알던 그 불같은 성질이 아니다. 훨씬 부드럽고 강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A는 스스로 나아지는 삶을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의 삶은 이런 메시지들을 던져왔다.
사람은 변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변화의 진리는 단순하다. 변화는 익숙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아침에 뛰는 습관을 들이려면, 늦잠 자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살을 빼려면, 술을 줄여야 한다.
변화에는 반드시 하고 싶은 것을 참아내야 하는 고통이 숨어있다.
그런 점에서 A는 인내심이라면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학창 시절 그와 함께 새벽 5시까지 술을 마셔도, 그는 아침 수업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A가 로스쿨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는 내가 아무리 같이 놀러 나가자고 꼬셔도, 그날 정해둔 공부 목표가 있으면 그걸 마치기 전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계절처럼 어김없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여름의 무더위도, 쌩쌩 칼바람이 손 끝을 얼어붙게 하는 겨울 한파도 언젠가는 새 계절을 향해 자리를 내어준다. 인간에게도 변화는 선택이 아닌 숙명이다. 좋은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A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마다 고유한 삶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내 삶이 흔적이 어떤 향기를 남기고 있는지 알아채고, 남과 나누며 사는 것. 그 과정에서, 서로가 좋은 쪽으로 변하는 것. 그게 곧 우리가 이 공간에서 글쓰기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