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평화의 땅.
저기 우리의 목적지가 보인다. 다 왔다. 구글지도를 이제는 꺼도 된다.
베를린 역사박물관, 그 비슷한 느낌인 곳에 왔다. 직접 그 시절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구글 리뷰를 보고 선뜻 목적지로 점찍어놓은 곳이었다.
거대한 돔 모양의 건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전시장도 저만큼 크고 입체적일 것 같다. 돔의 입구를 들어선다. 들어서자마자, 그 시절 쓰인 역사적 사료들(미디어, 뉴스페이퍼, 정부문서, 연인들의 편지 등등)이 관객들을 맞이한다.
제각기 다른 말을 하지만 결국은 모두 하나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네가 경험할 전시는, 동독과 서독이 베를린 장벽으로 나눠졌던 시대의 이야기야 ‘
관객들은 ‘꿀꺽~’하는 마른침을 삼킨다. 이제 그 시공간 들어가서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낯선 독일어가 들린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목소리 같다. 아 이건 라디오 소리가 확실히다. 세계 2차 대전 시기 독일군을 그린 영화들에서 나왔던 그 근엄한 독일 남자의 톤 앤 매너.
갑자기 취- 하는 수증기가 장내에 흩뿌려진다. 실내가 어둡다. 그런데 점점 공간이 밝아진다.
이거.. 베를린 장벽이다. 어두운 공간 속, 길을 잃지 않으려 더듬었던 벽에 베를린 장벽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마, 방금 전에 흩뿌려진 수증기는 아침에 오는 소나기를 묘사했던 것 같다.
100배쯤 하루를 빨리 재생하는 것처럼, 전시장 안에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전등이 켜졌다 꺼졌다. 그 거대한 전시장은, 베를린이 분단되어 있던 그 시절의 공간으로 돌아가서, 실제 그 시절의 일상을 100배쯤 시간이 빨리 흘러가게 구현함으로써 직접 경험케 하는 종합 무대 장치였다.
볼 것은 어찌나 많던지. 망원경을 통해 장벽 너머를 수시로 훔쳐보는 주민. 장벽 앞에 사진기를 가져다 놓고, 기념사진을 찍어서 인쇄해 주는 사진사. 빨래방 사장님이 빨래가 끝난 옷을 밖에 널어놓는 장면. 식당 앞에서 싸우는 남자들. 볼품없이 찌그러진 차를 고치고 있는 카센터 직원 등등. 그 시절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구현해 낸다.
전시관에선 관객들이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관심을 가지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 삶을 피부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는 어렵지 않게 전시관이 말하는 하나의 메시지에 도달하게 된다.
<나눠진 삶은 애닳프다.>
평화와 화해. 베를린에선 역사 속 사람들이 전해주는 이야기가 살아 숨 쉰다.
그러니까, 방금 위에 적은 베를린 전시관 관람기는, 회색토끼 작가님의 해설 중 ‘노잼국가’라는 독일의, 특히 베를린이란 도시만큼은 오해를 풀기 위해 쓴 글이다. 솔직히 나도 독일의 다른 도시는 재미없었다. 못 해도 다섯 번은 간 독일인데, 기억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딱 하나, 베를린만 빼고. 베를린은 진짜 유잼도시다.
위 사진은 작가님의 '2025 그레이 어워드 두 번째 수상자인 모블랙 인터뷰' 에서 캡처했다. 회색토끼 작가님은 나에게 '올해의 성찰상'이라는 의미 있는 이름의 상을 건넸다. 무척 고마웠다.
며칠 전, 제안메일 하나가 회색토끼 작가님으로부터 왔다. 메일 속에 좋은 질문이 이어졌고, 그 질문에 평소 생각대로 답했다. 질문의 요지가 명확하니, 답변이 어렵지 않았다.
작가님은 내 글솜씨를 칭찬했지만, 나는 그녀의 질문력을 되려 칭찬하고 싶다. 대부분의 경우에 '좋은 질문'이 '좋은 답변'보다 몇 배는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회색토끼 작가님이 진짜로 내 글을 꾸준히 읽어줬기 때문에,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고 느낀다. 내 인터뷰를 다시 큐레이팅하는 작가님의 글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가 쓴 글을 꾸준히 읽고 좋아해 주는 것. 그런 글들을 계속 쓰는 것. 모든 글 쓰는 이라면 진심으로 바라는 목표지 않을까?'라고.
그녀의 글을 다 읽고 나니, 문득 마지막 문단에 빼먹은 것만 같은 수상소감이 떠올랐다.
2025년, 다사다난했지만 글쓰기 좋은 한 해였습니다. 이 글을 빌려, 제 글을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작가님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