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움 Jun 17. 2023

4. 시선맞춤

상처는 때로 마음에 구멍을 낸다.

상처는 때로 마음에 구멍을 낸다.상처는 때로 마음에 구멍을 낸다.

“와! 여기가 이렇게 변했네. 예전엔 개천이었는데.”

여정과 시연이 입을 쩍 벌리고 공원 입구에 서 있었다. 호수에는 분수가 솟아오르고 푸른 잔디와 운동시설이 있는 넓은 공원이었다.

“호수 너무 좋다. 운동하는데도 있네!”

시연이 휠체어를 밀어 호수 가까이 다가갔다. 여정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마침 여정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여정이 숨을 내쉬고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씨익 미소 지었다.

“어, 별이 끝났어? 나? 데이트 중.”

여정이 장난스럽게 시연을 쳐다보며 웃었다. 시연이 마주 웃더니 근처 벤치 옆으로 휠체어를 밀었다.

“여기? 너 옛날에 가출해서 울었던 데 기억나? 아니, 오지 마! 여보세요?”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는지 여정이 소리치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건물주? 온대?”

시연이 여정의 다리를 들어 올려 벤치 위에 올려놓았다. 여정이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가 혼자 애 키우느라 심심하긴 할 거야.”

“별이 엄마는? 이혼한 거야?”

“그게... 이혼은 아니지? 결혼도 안 했으니까. 진오가 한국에서 박사 마치고 미국 들어와서 미친 듯이 일만 했거든. 그때 정신적으로 건강하진 않았어. 박사 과정에 있을 때 동거하던 첫사랑이 자살했거든. 우연히 별이 엄마를 만났대. 별이 엄마는 여행 중이었고, 일주일 정도 같이 보냈는데 별이가 생겼나 봐. 진오는 몰랐지. 진오한테 연락 안 하고 혼자 별이 낳아서 키우다가, 별이 두 살 땐가. 아동보호소에서 진오한테 연락이 온 거야. 별이가 친엄마한테 학대당해서 친부한테 연락했다고.”

시연이 벤치에 앉아 여정의 다리를 주물렀다. 여정은 감각이 없는 듯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별이 아빠는 별이 존재도 몰랐던 거네?”

“그치, 근데 걔가 대단한 게 전화받고 바로 귀국했어. 들어가기 어려운 연구소였는데 휴직계 내고. 그 길로 별이 데려와서 키운 거지. 딸바보, 저기 온다!”

공원 입구에서 별이 여정을 발견하고 마구 뛰어오자 풍이 별을 따라 뛰었다. 풍의 목줄을 잡고 있던 진오가 끌려오듯 달려왔다.  

“별이 왔어! 잘 뛰네, 별이!”

달려오던 별이 뻘쭘해졌는지 주변에 멈춰 섰다. 시연이 별을 보고 앉으라는 듯 벤치 한쪽을 툭툭 쳤다. 별이 시연을 빤히 쳐다본 채 천천히 움직여 벤치 끝에 엉덩이를 대고 걸터앉았다. 별이 시연에게 등을 돌리고 여정에게 젤리 통을 내밀었다.

“고모 먹으라고?”

여정이 젤리 통을 잡고 묻자 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별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번에는 시연에게 젤리 통을 내밀었다. 시연이 미소 지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열어줘?”

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시연은 젤리 통을 받지 않고 가만히 말했다.

“열어주세요.”

별이 입을 꾹 다물고 시연을 빤히 쳐다봤다. 진오가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여정이 손가락을 입에 대며 진오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했다. 진오가 어리둥절해하며 별이를 쳐다봤다.  

“별이! 아빠는 안 주면서 고모만 준거야? 아빠가 사준 건데!”

여정이 눈치 없이 떠드는 진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풍이 젤리 냄새가 좋았는지 젤리 통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별이 급하게 젤리 통을 품에 안았다.

“열어주세요.”

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진오가 나서며 참견하려 하자 여정이 진오의 입을 틀어막았다.

“열어주세요...”

별이 다시 한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연이 크게 반응하며 손을 내밀었다.

“네~ 열어줄게요.”

별이 시연의 손 위에 젤리 통을 놓았다. 시연이 뚜껑을 약간만 돌리고 별에게 돌려주었다. 별이 쉽게 뚜껑을 열어 젤리 하나를 꺼냈다. 기분이 좋은지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그러곤 시연을 쳐다보더니 젤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나 주는 거야?”

시연의 말에 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시연이 젤리를 한 입에 넣고 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이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며 젤리를 하나 더 꺼내 여정에게 내밀었다.

“와! 고모도 주는 거야? 고맙습니다.”

“아빠는? 아빠는~”

진오가 끼어들어 손을 내밀자 별이 젤리 통을 닫고 품에 안았다. 풍이 얼굴을 들이밀자 별이 고개를 숙이고 키득키득 웃었다.

“아, 시연씨! 거기... 치료실? 상담실? 작업실인가? 언제 오픈해요?”

한 발 물러선 진오가 생각난 듯 시연에게 물었다.

“이름은 뭐라고 지을 거야?”

여정도 궁금했는지 시연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글쎄, 마음을 표현하면서 해소도 하고 서로 도움이 되는 공간이면 좋겠는데. 뭐라고 하면 좋을까?"

"해소 공간?”

여정이 한참 고민하더니 중얼거렸다. 시연이 음미하듯 천천히 말하는데 진오가 끼어들었다.  

“암튼, 우리 별이 매일 보내도 되죠?"

“무슨 어린이집이냐? 별이 맨날 맡기고 너 놀려는 거지?

“아니, 우리 별이 말을 잘 안 하니까. 매일 보내면 좀 할까 해서 그렇지.

시연이 풍의 콧등을 쓰다듬어 주자 풍이 시연의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 별이 풍과 시연을 번갈아 쳐다봤다. 

“해소공간, 심상.”

시연이 여정을 보며 말하자 여정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은 내일 오픈할 거예요. 별이는 일주일에 세 번 어때요?”

시연이 의견을 묻듯 별을 쳐다봤다. 별이 빤히 시연의 눈을 마주 보다가 고개를 끄덕했다.


늦은 밤, 시연이 심상의 사무실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눈이 아픈지 손바닥을 비벼 눈 위에 올려놓았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푸우 소리를 내며 입으로 내뱉었다. 세 번 반복하더니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하며 일어나 노트북을 닫았다.

“천천히 하자. 건강이 우선이야!”

시연이 출입문을 잠그고 마당에 서자 따뜻한 바람 사이로 꽃향기가 났다. 화단에 다가가 보니 장미와 아카시아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다. 시연은 몸을 구부려 코를 갖다 대고 향을 맡았다. 그러다 문득 카페 건너편에 서 있던 남자가 생각났다. 혹시나 하여 건너편을 내다보는데 그 자리에 검은 형체가 보였다. 시연은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생각에 잠겨 시연을 인식하지 못했다.

“혹시...”

막상 그의 앞에 서자 뭐라고 물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시연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남자가 뒤로 물러섰다. 가로등 아래에서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말없이 서로의 눈을 탐색했다. 경계하던 남자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시연이 카페를 가리켰다.

“아들이세요?”

시연은 말하면서도 뜬금없는 질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리암이 아닐 수도 있으니 이름을 대는 건 곤란했다. 남자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불 꺼진 카페를 쳐다봤다.   

“아까 봤어요. 우리 엄마랑 알죠?”

“혹시 성함이?”

“리암, 리암한이에요.”

맞다. 시연은 그의 어눌한 한국어 발음과 이름을 말할 때 들리는 세련된 영어 발음이 그의 외모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왜 여기 있어요? 엄마 만나러 온 거 아니에요?”

리암이 고개를 떨궜다. 시연보다 이십 센티 정도 더 큰 리암의 키 덕분에 그의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눈물이 툭 떨어졌다. 시연은 일부러 카페를 쳐다보고 섰다. 리암의 어깨가 들썩였다. 시연이 카페를 응시한 채 리암의 큰 등을 뻣뻣하게 쓸어내렸다.


“엄마! 내가 도와준다니까?”

진가가 여정의 방 안에 있는 화장실 앞에 서서 소리쳤다. 화장실 문이 찰칵 열렸다. 여정이 샤워를 마친 듯 젖은 머리에 목욕가운을 걸치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나 혼자 할 수 있다니까. 아들은 이따 휠체어 좀 닦아줘.”

여정이 휠체어를 움직여 나오려 하자 진가가 끌어당겼다. 진가가 타월을 가져와 여정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여정이 휠체어를 움직여 한쪽의 의료용 침대로 다가가자 진가가 수납장에서 큰 수건을 꺼내 침대 위에 펼쳤다.

“고마워, 아들! 근데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여정이 나가라는 듯 진가를 쳐다봤다.

“엄마는 매번 그러더라. 아들인데 뭐가 부끄러워.”

“야, 아들이니까 부끄럽지! 엄마는 여자도 아니냐? 나가 얼른.”

“알았어. 문밖에 있을 테니까 도움 필요하면 바로 불러!”

진가가 나가자 여정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휠체어의 기어를 잠갔다. 두 팔로 휠체어를 잡고 침대에 걸터앉아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았다. 침대 위에 놓인 바디로션을 바르고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들어 속옷에 넣었다. 옆으로 누워 속옷을 끌어올리다 거울에 비친 자신과 마주쳤다.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여정은 수건을 얼굴에 대고 숨죽여 흐느꼈다.

“엄마, 다 했어? 엄마?”

한참을 기다려도 여정이 부르지 않자 불안해진 진가가 소리쳤다.

“나 들어간다!”

진가가 방으로 들어가자 여정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복학은 언제 해?”

여정이 아무렇지 않은 듯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복학하면 미국 가야 되잖아. 나 그냥 한국에서 일하려고.”

여정이 무서운 표정으로 진가를 노려보았다. 진가는 여정을 못 본 척하며 마른걸레로 휠체어를 꼼꼼하게 닦았다. 여정이 입을 다물고 숨을 들이키며 복잡한 감정을 가라앉혔다.

“엄마 혼자 괜찮아. 혼자도 아니지. 진오 삼촌도 있고 시연 이모도 있고 엄마의 엄마, 아빠도 근처에 계시잖아. 엄마 걱정해 줘서 고맙고 지난 일 년 동안 진가가 옆에 있어줘서 진짜 많이 고마웠어. 그런데 엄마 때문에 네가 원하는 진로를 바꾸는 거, 시간을 더 지체하는 거, 그건 아니야. 그럼 엄마가 죄책감이 생겨. 너한테 너무 미안해져서 마음에 병이 생길 거 같아.”

여정이 감정을 억누르고자 천천히 생각하며 말했다. 진가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휠체어를 닦았다.

“진가, 엄마 마음 이해했어?”

여정이 진가의 얼굴을 보고자 몸을 숙이며 물었다. 진가가 빠르게 일어나 여정의 품에 안겼다. 우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알았어. 복학 신청할게. 엄마. 살아 있어 줘서 진짜 고마워!”

“엄마 마음 알아줘서 고마워, 사랑해, 아들!”

진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여정이 진가를 힘껏 안아주었다.


리암이 심상의 소파에 앉아 흐느꼈다. 시연이 티슈를 꺼내 리암의 손에 쥐어 주었다. 리암이 티슈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였다.  

“엄마가 더 힘든데... 엄마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일까 봐...”

“편하게 울어요. 저는 잠깐 집에 다녀올게요.”

시연이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리암이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시연은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 밝게 비췄다. 달이 은은하게 비치는 밤은 마음을 꺼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게 아닐까 시연은 생각했다. 마음을 꺼내니 상처를 볼 수 있고 눈물로 소독하고 달빛과 밤의 공기가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게 아닐까. 리암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어찌 됐든 리암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을 거라 짐작했다. 시연이 심상으로 들어가려는데 리암이 문을 열고 나왔다. 리암의 눈두덩이 조금 부어있었으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고마워요. 살면서 소리 내 울어본 건 처음이에요.”

리암이 멋쩍은 듯 미소 지었다.

“저는 자주 하는데. 속이 후련해지거든요. 언니 만나실래요?”

시연이 애써 리암을 보지 않고 현관문을 잠그며 물었다. 답이 없어 돌아보자 리암이 물끄러미 달을 쳐다보고 서있었다. 시연이 그런 리암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달빛 때문인지 리암의 얼굴이 참 맑다고 생각했다.

“달이 참 밝네요. 엄마를 보고 웃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리암이 여전히 달을 바라본 채 미소 지었다. 그러곤 시연을 돌아봤다.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리암이 고개를 숙이며 시연과 눈을 맞췄다. 시연은 리암의 눈이 참 말갛다고 생각했다.


“형? 와우! 형! 엄마! 엄마! 형 왔어!”

현관문을 연 진가가 놀라 소리치며 리암을 안았다. 여정의 방에서 드라이기 소리가 들렸다. 진가가 여정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 깜짝이야! 너 엄마 방에 막 들어오지 말랬지!”

“아니, 형 왔다고!”

방안이 잠잠해졌다. 리암이 조심스럽게 여정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엄마, 들어가도 돼?”

리암을 본 여정이 수건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진가가 난감한 듯 리암을 쳐다보고 방을 나왔다. 리암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러곤 여정의 휠체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정이 울음을 참으며 말을 꺼냈다.

“미안해. 엄마가 너 일부러 속인 게 아니고. 면목이 없었어. 너 열 살 때 혼자 두고 나 혼자 살겠다고 떠났는데... 벌 받은 거지.”

“아냐. 엄마 벌 받을 행동 안 했어. 나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엄마랑 매일 통화했잖아. 엄마 나 자주 보러 왔잖아. 근데 1년 넘게 얼굴 안 보여줘서, 나만 몰라서 서운했어. 나 엄마 가족이야.”

리암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정이 두 손으로 리암의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미안해. 엄마가 또 네 생각을 못 했어. 엄마가 잘못했어.”

여정의 눈에 눈물이 쏟아지자 리암이 일어나 여정을 안아주었다. 둘의 울음소리가 거실까지 들렸다. 소파에 앉아 귀 기울이고 있던 진가가 쿠션에 눈물을 찍어냈다.

이전 03화 3. 물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