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움 Jun 17. 2023

3. 물꼬

충족을 위한 마중물은 내 안에 있다.

충족을 위한 마중물은 내 안에 있다.충족을 위한 마중물은 내 안에 있다.

한 낮, 햇살이 테라스 창으로 밀려들어와 거실 바닥을 덮었다. 고급스러운 소파와 세련된 소품들이 주인마냥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침낭이 꿈지럭거렸다. 시연이 얼굴만 남기고 지퍼를 채운 채 자고 있었다. 햇살이 따가웠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지퍼를 내렸다. 

“좋다...” 

시연이 얼굴을 찡그린 채 햇빛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곤 몸을 굴려가며 집 안을 살펴보았다. 오렌지빛깔의 넓은 소파와 하얀 드레스가 생각나는 독특한 모양의 조명 그리고 시원해 보이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미코노스섬의 바다로 향하는 골목길이 떠오르는 유화였다. 골목의 계단 아래 바다가 보였다. 시연은 몇 년 전 머물렀던 그리스의 햇살을 떠올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하얀 골목을 거닐던 그 시간의 공기와 소리가 떠올랐다. 

“좋다!” 

시연이 두 팔을 활짝 펴며 소리쳤다.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피어났다. 그때 새소리가 들렸다. 시연의 핸드폰 소리였다. 시연이 핸드폰을 확인하고 미소 지었다.

“언니! 이제 일어났어. 내려갈게!” 

전화를 끊은 시연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침낭을 안고 테라스로 나가 힘껏 털었다. 


후루룩 후루룩.

진오가 그릇에 코를 박고 쌀국수를 흡입하듯 들이켰다. 

“천천히 좀 먹지? 그렇게 맛있어? 도시락보다?”

여정이 장난스럽게 묻자 진오가 불룩해진 양 볼을 가로저었다.

“아니, 이건 밥이 아니잖아.”

진오가 그릇 채 들고 국물을 들이마셨다. 여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포장용기를 무릎에 놓고 휠체어를 움직여 주방으로 갔다. 진오가 여정을 도와줄 듯 엉덩이를 들썩이며 남은 쌀국수를 입에 털어 넣었다.

“국물 끓이게? 내가 해줄게.”

“됐어. 나도 할 수 있어. 앉아서 천천히 먹어.”

여정이 포장용기를 뜯어 국물을 냄비에 덜고 진오를 돌아보며 으쓱했다. 

“근데 누나, 이제 나랑 밥 안 먹을 거야?”

진오의 말에 여정이 이때다 싶었는지 휠체어를 돌리고 진오를 진지하게 바라봤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 이제 각자 밥 먹자. 나 소화도 잘 안되고 밥 먹는 거 부대껴. 나는 그냥 간단하게 먹고 싶단 말야.”

진오가 입을 삐죽 내밀며 그릇과 젓가락을 챙겨 일어났다. 여정을 쳐다보지 않고 말없이 싱크대에 서서 그릇을 헹구어 놓았다. 

“맘 상했어? 매일 그러자는 건 아니고, 일주일에 한두 번 같이 먹으면 좋잖아.”

진오가 여정을 무시한 채 행주를 들고 식탁 위를 닦았다. 

“일주일에 두 번!” 

진오가 싱크대에 행주를 털며 무심하고도 단호하게 외쳤다.  

“알겠어, 근데 너 우리 집에 올 때! 막 들어오지 말고! 물어보고 약속 잡고 와!”

여정의 말에 진오가 왜 그래야 하냐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여정을 쳐다보았다. 서운한 눈빛이었다. 

“집주인이 세입자 집에 올 땐 그렇게 하는 거야.”

“아니! 우리 사이에 그건 아니잖아!” 

“우리 사이가 뭐? 남매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그냥 남이야. 오래된 남!”

진오가 화난 눈빛으로 쏘아보며 울상을 짓더니 눈을 흘기고 나가 버렸다. 

“가족보다 친한 남이긴 하지. 그래도 나 이제 그만 신경 쓰고 네 인생 살아. 진오야...”

여정이 현관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다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1000477*

“만사 럭키 세븐!”

시연이 이층 집에서 내려와 일층 점포의 출입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자 뿌듯한 얼굴로 들어섰다. 블라인드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시연이 블라인드를 모두 올리자 공간이 확 밝아졌다. 넓은 공간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다. 시연이 한쪽 문을 열자 알록달록한 매트가 깔려 있었다. 오픈된 수납장 안에 블록과 장난감이 꽤 많았다.  

“놀이방이네. 어머, 예뻐라!”

시연의 시선을 끈 것은 작은 장난감 싱크대였다. 일곱 난쟁이가 쓸 것 같은 아기자기한 주방용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시연이 다른 문을 열자 사무실 같은 공간이 나왔다. 창가에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고 맞은편에 안락해 보이는 녹색 소파가 있었다. 시연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창 너머로 커다란 개가 시연을 보고 있었다. 시연이 일어나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옆집의 뒷마당이었다. 손을 흔들어 강아지에게 인사했다. 강아지가 활짝 웃는 듯 입을 벌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나 반겨주는 거지? 고마워!”

활짝 웃던 시연의 얼굴에 갑자기 침울함이 밀려들었다. 장례식장에서의 일이 생각나서였다. 시연은 장례식장에서 친언니를 오랜만에 만났다. 친언니는 승복을 입고 영정 앞에 앉아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상주였던 오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고 새언니는 안절부절못했다. 새언니는 시연을 불러 친언니를 빨리 데리고 나가라고 말했다. 절실한 개신교였던 새언니는 목사와 교회 식구들이 볼까 봐 좌불안석이었던 것이다. 친언니는 간단히 기도를 하고 일찍 일어섰다. 그녀의 작고 파르스름한 뒤통수는 시연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시연은 친언니에게 인사하듯 강아지를 보고 반갑게 웃었다.    

“고마워, 또 보자!”

시연이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크게 흔들었다. 그러곤 빠른 걸음으로 여정의 집으로 향했다. 그때 마침, 진오가 여정의 집에서 나왔다. 시연과 마주친 진오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시연이 인사하려다 멈추고 돌아보니 진오의 얼굴이 울상이었다. 시연은 무심코 건너편을 쳐다봤다. 

“있다!”

건너편에 서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시연이 무심코 소리쳤다. 그는 여전히 카페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시연과 눈이 마주치진 않았다. 시연이 말을 걸어볼까 생각하다 그만두고 여정의 집으로 들어갔다. 


“언니?” 

시연이 조금 열린 현관문 사이로 여정을 불렀다. 여정이 시연을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휠체어를 움직였다. 

“들어와. 들어와.” 

“왜 문이 열려 있어?”

시연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문을 닫았다. 여정이 웃으며 인덕션의 버튼을 눌렀다. 

“방금 진오 나갔는데, 문 덜 닫고 갔네. 못 만났어?”

“아, 표정이 안 좋던데?”

시연이 식탁 의자에 앉으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서운해서 그래. 금방 또 괜찮아져. 잠은 잘 잤어?”

“응, 완전! 오랜만에 푹 잤어.”

“다행이다. 배고프지? 쌀국수 먹자. 진오가 사 왔어.”

여정이 그릇을 옮기려 하자 시연이 얼른 잡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여정이 젓가락을 챙겨 들고 휠체어를 움직였다. 시연이 의자에 앉아 여정을 기다렸다.  

“그런데 언니 여태 밥 안 먹고 나 기다린 거야? 한 시가 넘었는데?”

“오늘은 첫날이니까! 근데 요즘 배가 안 고프기도 해. 잘 안 움직여서 그런지 소화도 안 되고.” 

“밥 먹고 나랑 같이 산책 가자. 카페 늦게 열어도 돼?”

“카페 열어놓고 가도 돼. 키오스크랑 제조 로봇이 다 해주거든.”

“와, 좋다, 좋다. 참 편리한 세상이야! 재활은 꾸준히 하고 있어?”

여정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었다. 시연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여정을 바라봤다. 여정이 젓가락으로 국수를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하긴 해야 되는데, 아프기만 하고... 조금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힘이 안 나.”

“많이 아프지... 근데 언니도 알잖아. 고통 없는 회복이 어딨어. 성장도 발전도 다 극복 후에나 오는 거잖아. 나랑 같이 조금만 더 힘내보자.”

시연이 따뜻한 시선으로 여정을 바라보며 어깨를 쓰다듬었다. 여정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먹어. 국수 불어. 이거 우리 동네 최고 맛집 쌀국수야!”

여정의 재촉에 시연이 국물을 들이켜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나 이 맛 알아! 어제 근처에서 쌀국수 먹었거든. 어쩐지 12시도 안 됐는데 줄 서 있더라.”

“그래? 또 쌀국수 먹어서 어떡해? 밥 시켜줄까? 억지로 먹지 말고.”

“아냐, 아냐. 여기 맛있었거든. 어제저녁에 또 생각나더라. 언니도 얼른 먹어. 천천히 꼭꼭 씹어서.”

시연이 국수를 들이켰으나 여정은 계속 신경이 쓰이는 듯 바라보았다. 

“내일은 고기 구워 먹자!”

“좋아. 국수도 좋고 고기도 좋고!”

시연이 그릇을 들고 국물을 마시는데 벽에 걸린 여정의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 남자 누구야?”

여정의 눈이 사진에 꽂힌 시연의 시선을 따랐다.

“진가는 알고 리암이는 처음 보나?”

시연이 여전히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여정이 시연의 눈앞에 손을 휘저었다.

“소개해 줄까? 훈남이지? ”

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정을 쳐다봤다.

“아니. 아니, 아니. 훈남이긴 한데 언니 아들이면 나한테도 아들이지!”

“아들은 무슨! 내가 걔를 스무 살에 낳았거든. 너랑 열 살 차이도 안 나.” 

“그렇구나. 근데 미국에 있는 거 아냐?”

“왜? 장거리는 싫어?”

시연은 카페 건너편에 서 있던 남자가 여정의 큰아들, 리암이라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 간 여정은 일찍 결혼하여 리암을 낳았다. 남편은 재미교포로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에서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잘생긴 외모와 체격, 친절한 매너까지 완벽한 사람이었지만 많은 여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즐기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임신과 더불어 결혼한 여정은 자존감이 낮아지면서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고통받았다. 결국 리암이 열 살 때, 여정은 이혼하여 혼자 귀국했다. 매년 두세 번 리암을 만나러 미국에 가고 매일 영상통화를 했지만 여전히 여정은 리암에게 미안했다. 작년, 여정은 미국대학에 입학한 둘째 아들 진가와 의료로봇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리암을 만났다. 그 후 남미를 혼자 여행하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여정은 리암에게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진가는 바로 학교를 휴학하고 여정의 보호자 노릇을 했다. 그런데 리암이 여정의 집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이다. 왜 만나러 오지 않는 걸까? 시연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리암이는 장거리도 괜찮아. 애가 잘생기고 능력도 있고 되게 젠틀한데, 여자한테 관심이 없거든. 바람날 일이 없다니까.”

시연이 앞에서 조잘대는 여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리암이는 아빠가 바람둥이여서 엄마랑 이혼했다고 생각하거든. 뭐, 틀린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그런지 애가 엄마 말고는 여자한테 되게 차가워. 쳐다보지도 않아. 아마 연애도 안 해봤을걸?” 

시연이 말없이 국물을 들이켰다. 

“여기 쌀국수 국물 진짜 맛있다. 근처에 공원 같은 거 있어?”

시연이 빈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가서 설거지를 하며 물었다.

“시연! 연애 얘기만 나오면 들은 체도 안 하더라? 결혼은 몰라도 연애는 해야지!”

여정이 휠체어를 움직여 시연의 옆에 섰다. 

“나는 나랑 연애 중이야. 남자한테 방해받고 싶지 않아.”

“그 얘기 콜카타에서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똑같이 했다! 그게 몇 년 전이야? 한 오 년 됐나?”

시연이 그릇을 엎어 놓고 고무장갑을 털며 웃었다. 

“육 년. 진가가 그때 열세 살이었잖아. 이모! 바퀴벌레 엄청 커! 길바닥에 앉기 싫어. 더럽단 말이야! 그때 진가 되게 귀여웠는데.”  

시연이 팔을 흔들며 아이의 흉내를 내자 여정이 박장대소하며 큰소리로 웃었다.

“맞아. 시연이 너 처음 봤을 때 담벼락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가지고 밥 먹고 있었잖아! 진가가 거지냐고, 자기는 거기서 밥 안 먹겠다고 도망 다녔는데.”

“그래도 거기 줄 서서 먹는 맛집이었어. 테이블이 없어서 그렇지.”

여정이 고개를 끄덕이다 과거를 회상하듯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시연이 그런 여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정이 침묵을 깨고 중얼거렸다. 

“다시 갈 수 있을까? 두 발로 걸어서...”

“갈 수 있어! 일단, 산책부터 가자!”

시연이 힘을 전해주듯 여정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눈을 맞췄다. 


“별이 오늘은 뭐 고를 거야?”

새하얗게 쉰 머리를 질끈 묶은 편의점 주인이 별이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별이 혼자 쪼그리고 앉아 이것저것 집적대며 열심히 고민 중이었다. 결국 캐릭터 뚜껑이 달린 젤리 통을 들더니 문밖에 서 있는 진오를 쳐다봤다. 

“골랐어? 사장님 보여드려.”

별이 젤리 통을 들고 계산대로 가더니 팔을 뻗어 주인에게 내밀었다. 

“예쁜 거 골랐네! 이천 원이야.”

주인이 바코드를 찍고 손을 내밀자 별이 진오를 다시 쳐다봤다. 

“가방에서 두 개 드리면 돼.”

진오가 풍의 목줄을 잡고 서서 다른 한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였다. 진오의 옆에 앉아 있던 풍이 별을 보며 빨리 오라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별이 가방에서 천 원짜리 두 개를 꺼내 주인에게 내밀었다. 

“아이고, 우리 별이 똑똑하네. 고마워.”

별이 젤리 통을 들고 뛰어나가자 진오가 별을 잡아 세웠다. 

“별이, 인사하고 가야지.” 

별이 주인을 빤히 바라본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진오가 별의 뒤통수를 살짝 누른 것이다. 진오가 주인에게 찡긋하고 돌아서는데 별이 진오에게 젤리 통을 내밀었다. 

“열어줘?”

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오가 순순히 뚜껑을 열어 별에게 주었다. 별이 젤리는 먹지 않고 캐릭터 뚜껑만 쳐다보자 진오가 별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빠 젤리 좀 줘.”

별이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너 혼자 다 먹을 거야? 아빠가 사준 건데?” 

별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카페로 뛰어갔다. 풍이 별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진오가 끌려가듯 달렸다. 별이 카페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바로 다시 나왔다. 풍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려던 진오와 눈이 마주쳤다. 

“왜? 고모 없어?”

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오가 이상한 듯 갸웃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여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전 02화 2. 끌어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