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는 불안을 거스른다
시연이 핸드폰을 확인하며 걷다가 카페 앞에 멈춰 섰다. ‘카페 정’이라고 쓰인 간판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출입구 버튼을 눌렀지만 열리지 않았다. 시연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한 시 십분 전이었다.
“식사하시나?”
시연이 카페 주변을 살피다 건너편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말끔한 옷차림의 남자가 카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핸드폰과 카페를 번갈아 보느라 시연을 의식하지 못했다. 시연이 옆 가게 마당에 있는 의자를 발견했다. 마침 옆 가게는 비어있었다. 시연이 천천히 캐리어를 끌고 움직였다. 건너편의 남자는 꼼짝하지 않고 카페를 바라봤다. 시연은 의자에 앉아 건너편의 남자를 관찰했다. 십 분 정도 지났을까, 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의 눈빛은 의식이 돌아온 듯 살아있었다. 시연이 카페를 바라봤더니 출입구가 열려 있었다. 시연은 천천히 일어나 카페로 향했다.
“별아! 여기, 여기! 아빠 여기 있네!”
진오가 유치원 마당에 서서 두 팔을 흔들었다. 별이 무표정으로 유치원 현관을 나오다가 진오를 쳐다봤다. 다른 아이들은 마중 나온 엄마 품으로 달려가기 바빴다. 진오 뒤에서 땅을 헤집던 세 살 골든 레트리버, 풍이 얼굴을 들었다. 별이 풍을 발견하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가 안겼다. 옆에 서서 뻘쭘해진 진오가 스르르 주저앉아 풍과 별을 앉았다.
“별아, 아빠 좀 안아줘.”
진오가 별의 귀에 대고 속삭였지만 별은 듣지 않고 풍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치, 아빠 삐쳤어. 뽑기 안 해준다!.”
별이 뽑기라는 말에 반응하여 진오를 쳐다봤다. 진오가 두 팔을 벌리자 별이 쭈뼛쭈뼛 다가갔다. 진오가 덥석 별을 안자, 별이 답답한 듯 몸을 뺐다.
“가자~ 뽑기 하러 가자~”
진오는 별의 유치원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풍의 목줄을 잡고 걸었다. 별이 진오와 풍 사이에서 풍의 털을 잡고 걸었다.
여정이 휠체어를 움직이며 카페 안을 돌아다녔다. 무릎에는 알코올 분무기와 마른행주가 놓여 있었다.
“우리 아들, 기특하네. 피곤했을 텐데... 청소도 싹 해놓고.”
여정이 휠체어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 버튼을 누르자 벽면의 대형 화면에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여정이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볼륨을 높이자 파도 소리가 크게 들렸다. 여정이 눈을 감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여정은 지중해 해변을 걷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2년 전에 갔던 이탈리아 카프리섬에서 찍은 영상이었다. 그때의 공기, 냄새, 햇빛, 바람 등이 그대로 느껴졌다.
“언니!”
시연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에 묻혀 어렴풋이 들렸다. 여정은 시연을 처음 만났던 콜카타 골목이 떠올랐다. 여정의 어깨에 따뜻한 촉감이 느껴졌다. 여정이 살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 시연의 얼굴이 보였다.
“어머! 시연!”
여정이 두 팔을 벌려 시연을 안았다. 시연이 허리를 구부리고 어정쩡한 자세였지만 둘은 한참을 안고 있었다. 여정과 시연의 눈에 눈물이 살짝 차올랐다. 여정이 뒤늦게 휠체어를 의식하고 시연을 풀어주었다.
“아이고, 허리 아프지? 여기 앉아.”
시연이 괜찮다는 듯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여정이 파도 소리가 거슬렸는지 리모컨으로 볼륨을 내렸다.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어. 어머니는 잘 보내드렸어? 너는, 아픈 데는 없고? 어디서 지냈어?”
여정이 질문을 쏟아내자 시연이 담담하게 웃었다. 여정도 웃었다.
“천천히 하자. 뭐 줄까? 커피? 차?”
시연이 여정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난 괜찮아. 언니는 어때?”
여정이 시연을 바라보았다. 시연의 따뜻한 눈과 마주치자 여정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그때, 카페의 문이 열리고 별이 뛰어 들어왔다. 손에 든 뽑기를 쳐들고 상기된 얼굴이었다. 여정을 향해 달리던 별이 시연을 보고 멈췄다.
“별아, 고모 친구야.”
여정이 급하게 눈물을 닦고 별을 감싸 안았다. 별이 굳게 서서 시연을 빤히 쳐다봤다.
“안녕! 별이 뽑기 했구나? 뭐 뽑았어?”
시연이 웃으며 뽑기에 관심을 보이자, 별이 눈을 꿈뻑였다. 그러곤 천천히 뚜껑을 열어 보였다. 티니핑 피규어가 있었다.
“와! 예쁘다! 별이 좋아하는 거 뽑았네.”
여정과 시연이 엄지를 내보이며 칭찬하자 별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별이 여정을 보며 대형화면을 가리켰다.
“별이~ 티니핑 틀어줘?”
별이 고개를 끄덕이고 화면 앞의 빈백으로 뛰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정이 리모컨을 누르자 대형화면에 티니핑이 나왔다. 별이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말을 못 하는 건 아니고, 잘 안 해.”
여정이 시연을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곤 휠체어를 움직여 냉장고로 가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시연이 별을 지그시 바라봤다. 다시 카페의 문이 열리고 진오가 들어왔다.
“누나! 나 탄산 좀!”
진오는 시연을 못 봤는지 바로 해먹으로 가서 드러누웠다. 여정이 쟁반 위에 샌드위치와 주스를 담고 있었다. 시연이 냉장고로 가서 탄산수를 꺼내 여정에게 주고 쟁반을 받아 들었다.
“진오 알지? 건물주!”
여정의 말에 시연이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이 쟁반을 들고 별에게 다가갔다. 별이 음악에 맞춰 발을 까딱까딱하다가 시연을 의식하고 굳어 버렸다.
“샌드위치 먹을래?”
시연이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고 물었다. 한참 기다리자 별이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이 샌드위치 하나를 별의 입 앞으로 내밀었다. 별이 한참 망설이다가 입을 벌려 한 입 베어 물었다.
“자, 난 갈 테니까 편하게 먹어.”
시연이 웃으며 별의 손에 남은 샌드위치를 쥐어 주었다. 별이 시연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샌드위치를 한 입에 쑤셔 넣었다.
“누구?”
해먹에 누워있던 진오가 시연과 별을 발견하고 일어나 앉았다.
“전에 말했던 시연이.”
여정이 탄산수를 진오에게 건네주며 답했다. 진오가 벌컥벌컥 탄산수를 마시고 트림을 했다. 여정이 인상을 찌푸리자 진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일어섰다.
“아, 옆 가게 오신다는? 안녕하세요!”
진오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시연이 마주 인사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여정을 쳐다봤다.
“옆 가게?”
여정이 진오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난처한 듯 시연을 보고 웃었다.
“아니, 카페 옆에 공간이 비었는데... 일단 보고 얘기하자.”
카페 건너편에 서 있던 남자의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이 울렸다.
“어, 어제 들어왔어. 호텔에... 아직 좀... 괜찮아지면 만날게.”
남자가 전화를 끊고 다시 카페를 쳐다봤다. 카페 문이 열리고 휠체어를 탄 여정이 웃으며 나왔다.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맺혔다. 남자는 급하게 뒤돌아 주저앉았다. 휠체어를 밀고 나오던 시연이 건너편의 남자를 바라봤다. 주저앉은 뒷모습이 보였다.
“왜? 잘 안 돼?”
여정이 휠체어가 멈추자 시연을 보고 물었다. 시연이 얼른 휠체어를 움직여 방향을 꺾었다.
“아니, 어떤 남자가 카페를 계속 보고 있는 거 같아서.”
“그래? 손님인가? 잘 생겼어?”
여정의 뜻밖의 질문에 시연이 말문이 막혔다.
“뭐야, 진짜 잘 생겼나 보네?”
“음... 훈남인 듯?”
시연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여정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진오가 여정의 웃는 모습이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여기야. 좀 오래 비어있었는데 이번에 싹 수리했어. 진오야 문 열어줘.”
여정이 진오를 돌아보자 진오가 빈 점포의 번호키를 눌러 문을 열어주었다.
“누나가 엄청 신경 써서 인테리어 했어요. 자기 카페에는 관심 1도 없었는데!”
“카페는 너랑 진가가 나 모르게 준비한 거고. 여기는 작아서 인테리어 할 것도 없었어.”
시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점포 안으로 들어섰다. 여정이 진오에게 마당에 있으라고 손짓한 후 휠체어를 움직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남미에서 하던 일 여기서 하면 좋을 거 같아서...”
여정이 조심스럽게 말하고 시연의 표정을 살폈다. 시연은 생각이 많아진 듯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나갈 계획이야?”
“잘 모르겠어. 떠날 명분도, 남아있을 이유도, 아무것도 없는 거 같아.”
여정의 물음에 시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연이, 네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 근데 남아있을 이유가 필요하다면 내가 되면 안 될까? 힘들 때마다 그런 생각했거든. 너랑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 그럼 마음이 좀 편해질 텐데...”
여정의 목소리가 떨렸다. 시연이 여정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여정을 살폈다.
“나 약해졌나 봐. 자꾸 눈물이 나. 삼십 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녔으니까, 이제부터 못 걸어도 손해는 아니다 싶다가도 나 혼자 일어설 수도 없으니까 너무 갑갑해.”
“일어날 수 있어. 병원에서도 재활하면 가능하다고 했다며?”
“지난 일 년 동안 미친 듯이 재활했어. 근데 전혀 힘이 안 들어가.”
여정이 낙담한 듯 고개를 떨궜다.
“내가 도와줄게. 같이 병원도 가고 얘기도 하고.”
“진짜?”
시연의 말에 여정이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였다. 시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근데 언니, 그런 일은 돈 벌기 어려워. 여기 월세도 꽤 나갈 거 같은데...”
“월세 걱정은 안 해도 돼. 건물주가 유지비만 받기로 했거든. 내가 낼 거야. 너는 돈 걱정 말고 그냥 있어주기만 하면 돼. 그리고 여기 이층도 비어있거든? 거의 이십 년 동안 비어있던 집이라 아주 착한 월세를 받기로 했어. 거기서 살면 돼.”
여정이 시연의 입을 막듯 말을 쏟아냈다. 그러곤 두 손을 모아 애절한 눈빛으로 시연의 답을 기다렸다. 시연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럼... 딱 일 년만 신세 질게. 그동안 언니는 무조건 일어나는 거야!”
시연이 긴 망설임 끝에 입을 뗐다.
“신세는 내가 지는 거지! 시연이 옆에 있어주면 나 진짜 일어날 수 있을 거 같아.”
여정이 기뻐하며 두 팔을 벌리자 시연이 다가가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