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움 Jun 15. 2023

1. 이끌림

결핍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흑곰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아, 진짜! 얘기 좀 하자고!"

검은 후드 점퍼와 검은 바지를 입은 덩치 큰 남자가 소리쳤다. 오전 11시 반, 한적한 골목이었다. 시연은 건너편 인도를 걷다가 그의 목소리에 멈춰 섰다. 언젠가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본 흑곰이 떠올랐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영상 속 흑곰은 너무나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저 남자도 답답한 듯, 화가 난 듯 울부짖었다. 차 한 대가 지날 만큼의 차도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시연은 조금 긴장이 되어 시선을 거두고 무거운 캐리어를 다시 끌었다.   

"됐어. 할 얘기 없어. 이거 놔."

남자의 큰 등판 너머로 작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연이 멈칫하여 다시 건너편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시연이 남자를 주시하며 천천히 걸었다. 남자가 잡고 있는 하얗고 가느다란 팔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내가 할 말 있다고."

남자가 더 세게 팔을 잡았는지 여자가 인상을 쓰며 팔을 빼려고 했다. 여자는 키가 작고 왜소했다. 시연은 주변을 둘러봤다. 저 멀리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도움을 청하기엔 너무 멀었다. 시연은 핸드폰을 꺼내 112를 눌렀다. 여차하면 통화 버튼을 누를 생각이었다. 다시 건너편을 바라보는데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눈빛은 싸늘했다.


"아싸~ 소불고기!"

진오가 도시락 두 개를 낚아채듯 잡았다. 같은 도시락을 잡으려던 여자의 손이 갈팡질팡했다. 진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계산대로 갔다. 백발의 편의점 주인이 둘을 지켜보다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주인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미리 빼달라고 하면 내가 빼놓지, 매일 오면서. “

편의점 주인이 바코드를 찍으며 말했다.  

"에이, 그러면 고르는 재미가 없잖아요. 득템의 기쁨도 없고!"

진오가 소불고기 도시락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맨날 도시락 먹으면... 물리지 않아?"

편의점 주인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묻자, 진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간편하고!"

진오가 카드를 꽂고 알록달록한 장바구니 안에 도시락 두 개를 집어넣었다.

"뭣보다 설거지 안 해도 되잖아요! 이따 또 올게요 “

편의점 주인이 재미있다는 듯 진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릴 때도 그렇게 삼각 김밥만 먹더니... 사람 참 안 변해.”

여자가 삼각김밥과 커피우유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편의점 주인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바코드를 찍었다.

“다른 도시락도 맛 괜찮은데...”

여자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이자 편의점 주인이 입을 다물었다. 여자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동네 사람은 아닌데... 소불고기가 인기가 많네. 주문을 더 넣어야 되나.”

주인은 잠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냉장 코너로 가서 물건을 정리했다. 여자는 밖으로 나와 멀어진 진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역시... 기억 못 하네.”  


차가운 여자의 시선에 시연은 움찔했다.

‘어떡하지?’

고민하는 순간 시연의 눈앞에 알록달록한 장바구니가 훅 들어왔다. 놀란 시연이 몸을 뒤로 뺐다. 진오는 시연이 안 보이는 듯 기지개를 켜며 지나쳤다. 시연은 어이가 없어 진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해! 엄마 이제 안 와."

여자가 남자의 손에 잡혀 있던 자신의 팔을 비틀어 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가 멍하니 서 있었다.  

"연락하지 마. 번호 바꿀 거야."

여자의 핸드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자 콜택시가 여자의 앞에 섰다. 여자가 남자를 흘끗 쳐다보더니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는 떠났고 남자는 꼼짝하지 않았다. 시연은 떠나는 여자와 진오의 뒷모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남자가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분노가 아닌 서러움, 외로움, 슬픔이 느껴졌다.

‘그런데... 엄마?’

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큰 덩치와는 달리 앳된 얼굴이었다. 남자는 답답한 듯 자신의 가슴과 머리를 치며 흐느꼈다. 시연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 무거운 캐리어를 다시 잡아끌었다. 저 멀리 알록달록한 장바구니가 흔들거렸다.


여정이 식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이패드 화면의 내용을 유심히 읽다가 마음에 안 드는지 삭제 버튼을 마구 두드렸다. 여정이 짜증 나는 듯 돋보기안경을 벗어 식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컵을 들어 물을 마시려는데 한 모금뿐이었다. 여정이 휠체어 바퀴를 돌려 뒤쪽의 정수기로 가려는데 운전이 서툴러 마음대로 가지 않았다. 화가 난 여정이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소리를 꽥 질렀다. 그때, 현관에서 삐삐삐 삑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소불이랑 함박! 뭐 먹을래?"

진오가 들뜬 목소리로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여정이 무표정으로 크게 심호흡을 하자, 진오가 가만히 서서 여정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눈을 굴렸다. 여정의 무릎 위에 널브러져 있는 컵이 눈에 들어왔다.  

“물 마시려고?”

진오가 빠르게 컵을 낚아채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됐어. 내가 해 봐야지. 언제까지 도움만 받아."

여정이 서툴게 휠체어를 움직여 정수기 앞으로 갔다. 진오가 그런 여정을 불안하게 쳐다보고 서 있었다. 여정이 진오가 든 컵을 잡았다.

"나 있을 땐 그냥 시키라니까."

진오가 여정의 따가운 눈초리를 이기지 못하고 컵을 건네주었다. 그러곤 여정의 눈을 피해 장바구니에서 도시락 두 개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여정이 싱크대 서랍을 열어 작은 쟁반과 젓가락을 꺼냈다. 진오가 가까이 다가가 도와줄지 말지 망설이며 안절부절못하자 여정이 인상을 팍 썼다.

“앉아서 기다려. 내가 한다고.”

여정이 무릎 위의 쟁반에 컵과 젓가락을 올려놓고 휠체어를 천천히 움직였다. 진오가 식탁 의자에 앉아 도시락의 뚜껑을 열며 애써 여정을 외면했다.

"밖에선 어쩔 수 없어도 집안에서는 혼자 해 버릇해야지."

식탁 앞에 멈춘 여정이 젓가락을 챙겨 진오에게 건넸다. 진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운전 잘하는데 뭐. 휠체어 탄지 이제 한 달 됐나? 이 정도면 뭐, 훌륭해!”

진오가 여정의 다리를 쳐다보자 여정도 고개를 숙여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앞으로는... 평생 이러고 살아야 되잖아."

"무슨! 재활 열심히 하고! 그럼 다시 걸을 수 있어."

진오가 젓가락으로 소불고기를 듬뿍 집어 여정의 밥 위에 올려놓았다.

"일단 많이 먹고! 운동하자!"

진오가 배가 고팠는지 밥을 입안 가득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여정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소불고기를 조금 집어 먹었다.


시연이 인도에 멈춰 서서 지도 앱으로 길을 확인했다. 가야 할 길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배가 고팠다. 시연이 주변을 둘러보는데 쌀국숫집 앞에 세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이제 막 12시였다. 시연은 줄 끝에 섰다.

"12번 들어오세요. 기다리시는 분들은 키오스크 주문 먼저 해주시고요."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점원이 나와 키오스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연이 캐리어를 세워 놓고 문 옆의 키오스크로 다가갔다. 열린 문 사이로 가게 안이 들여다보였다. 작은 가게 안에 사람들이 꽉 차있었다. 후루룩 국수를 들이켜는 사람들의 표정은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

꾸르륵

시연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생각해 보니 며칠 동안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했다. 아니, 한 달 넘게. 어쩌면 지난 몇 년간, 편안하게 밥을 먹었던 적이 있었던가, 시연은 곰곰 생각했다.

"15번 들어오세요."

시연은 자신의 번호표를 확인하고 캐리어를 끌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 구석에 캐리어를 세워 놓고 빈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의 남자가 국물을 들이켜고 그릇을 내려놓았다. 남자의 얼굴을 보니 엄마의 표정이 떠올랐다.


“어우, 잘 먹었다.”
짜장면의 양념까지 싹싹 긁어먹은 시연의 엄마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평온하고 느긋한 표정이었다. 시연은 그런 엄마의 표정이 낯설었다.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엄마는 늘 심통 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날엔 남편에게, 남편을 보낸 후엔 아들에게, 아들이 장가간 후엔 딸들에게 엄마는 늘 불만을 토로했다.


“쌀국수 나왔습니다 “

점원의 목소리에 시연이 눈을 떴다. 옆자리의 남자가 일어나 벽에 걸려 있던 재킷을 꺼내 들었다. 산뜻한 향기가 났다. 시연은 그릇을 들고 국물을 마셨다. 오랜만에 먹는 따뜻한 음식이었다. 엄마의 장례식이 있었던 일주일 전이었을까, 엄마가 병원에 계셨던 한 달 전이었을까, 엄마를 떠나 외국을 헤매던 칠 년 동안이었을까. 따뜻한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없었다.

“그래도 엄마가 해 준 밥은 따뜻했는데.”

시연이 쌀국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두 달 전, 시연은 남미에서 아트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다섯 살부터 팔십 노인까지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자유롭게 표현하고 나누는 활동이었다. 엄마를 떠나온 지 칠 년째, 시연의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평온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평화는 지속되지 않았다. 엄마가 쓰러졌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시연이 떠나고 엄마는 막무가내로 오빠의 집으로 들어갔다. 군대를 전역하고 서른에 데릴사위가 되어 엄마 곁을 떠난 오빠. 부잣집 외동딸로 어려움 없이 자란 새언니는 엄마에게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일 년 남짓 엄마는 아들 부부와 함께 살았다. 그동안 새언니는 오빠에게 엄마를 실버타운으로 모실 것을 종용했고 엄마는 결국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시연에게 연락한 것은 오빠였다. 오빠는 다짜고짜 엄마가 요양병원에 계시니 얼른 와서 간호하라고 했다. 시연은 곧바로 귀국했다. 오빠의 명령 섞인 말 때문이 아니라, 혼자 방치되어 있을 엄마 때문에 마음이 조급했다.    


“도시락 물리지 않니? 밥 좀 따로 먹자니까.”

여정이 반찬을 뒤적거리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진오가 입안 가득 음식을 씹고 있었다. 진오가 여정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며 음식을 꿀꺽 삼켰다.

“천천히 좀 먹어.”

여정이 컵을 진오에게 밀어주고 식탁 위 아이패드를 눌러 시간을 확인했다.

“별이 끝나려면 아직 시간 남았구먼.”

진오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여정이 고개를 저으며 남은 반찬을 모았다.

“아니, 밥이 맛있어서 그렇지. 엊저녁도 피자 먹었거든. 그거, 소불고기 왜 남겨. 아깝게!”

진오가 여정이 모아놓은 반찬 더미에서 소불고기를 골라 입속에 넣었다.

“그걸 또 집어먹냐. 더럽게! 소고기 사줄게. 그만해!”

여정이 도시락을 옆으로 뺐지만 진오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불고기를 골라 먹었다.  

“뭐가 더러워. 우리 사이에. 나는 우리 별이가 씹다 뱉은 고기도 그렇게 맛있더라!”

진오가 두 볼 가득 밥을 넣고 말하는 바람에 밥풀이 튀었다.

“어우, 야!”

여정이 휠체어를 움직여 몸을 뒤로 뺐다. 진오가 미안하다는 듯 손바닥을 보였다.

“근데 요새도 저녁엔 피자야? 애가 아무리 고집부려도, 골고루 먹여야지.”

진오가 남은 반찬들을 젓가락으로 모으는데 집중했다.

“다른 건 아예 입에 안 넣어. 나 어릴 때랑 똑같아. 누나 기억나? 나 중학교 3년 내내 삼각 김밥만 먹었잖아.”

진오가 도시락을 들고 한 데 모은 반찬을 입안으로 쓸어 넣었다. 여정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때보단 낫다. 반찬도 여러 가지고...”

진오가 입을 다물고 여정을 보며 씩 웃었다. 빈 도시락을 여정에게 쓱 밀어놓고 물을 마시며 일어섰다.

“별이 하원 시간! 풍이 데려가려면 늦었어! 뒤처리 좀 부탁해!”

진오가 허겁지겁 뛰어나갔다. 여정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진오의 장바구니를 집어 천천히 접었다. 아이패드의 화상 통화 벨이 울렸다. 큰아들 리암이었다. 여정은 꼼짝하지 않고 벨소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