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차 주말을 맞이한다. 주말이라고 떼 지어 우르르 몰려다니며 현지 적응 한답시고,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던 지난날과 비교해, 엄청 조신하고 소심하게 하루하루를 운행하고 있다. 이제 열흘 남짓 되었으니, 콜롬보의 동서남북 방위를 제대로 알고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로 구글 지도에 의존하다 보니, 페이퍼로 된 지도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은 했지만, 뭐 그런대로 필요할 때 핸드폰에서 지도를 펼치면, 현재 위치를 표시하면서 제대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 체크할 수가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예기치 않게 고려하지 않은 상황이 최악처럼 다가 설 수도 있고, '아주 작은 준비'가 위기를 모면해 줄 수 있다는 실례를 경험하게 된다.
최악의 상황은 9.28(토) 오후. 그 맑고 푸르던 날씨가 오후 4시경, 칠흑처럼 검게 물든 하늘로 순식간에 변하더니만, 마구 쏟아내는 물줄기와 함께 천둥이 울고, 번개는 천둥의 꼬리를 잡고, 천상에서 천하로 날아드는 한낮 어둠 속, 아주 작은 준비라 했던 그것은 다름 아닌 '순토 나침판'이다. 산에서 길을 염려해 늘 외지에 나서면 동행하던 나침판이 제대로 이 몸을 구출해 주었다. 그날의 서스펜스를 기억하는데 서술의 약간의 과장은, 너그럽게 벗들에게 이해를 구한다. 먹지 못한 떡은 아쉬움이 보태져 더욱 커 보이고, 쥐꼬리 같던 일말의 경험은 마구 부풀려져 소꼬리 정도로 부풀렸다고 보면 딱이다.
사연은 이러했다. 펫타 시장(콜롬보의 대표적 농산물 시장)으로 나들이를 정하고 길을 나서면서, 지도와 나침판의 방위를 일치시키고, 가고자 하는 방향의 각도를확인하고, 그 방향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즉, 숙소에서 펫타 시장의 방위각은 북서 340도로 거의 정북에 가깝고, 오는 방향은 그 반대쪽인 남동 160도로 기억하고 출발했다. 거리는 대략 8 km, 맑은 하늘엔 간간히 바람이 불어, 걷기에 더할 나위 없는 그날의 날씨였다. 그리고 스케줄대로 시장에도착해 장보기를 끝냈다. 가는 방향만 맞으면 숙소 반경 500m 내에서는, 기억한 표지판이나 길의 생김새를 보고 숙소로 들어서면 상황은 종료되고, 한잔 맥주로 마무리해도 좋을, 주말 나들이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점점 그 좋던 날씨가 꾸물 꾸물하더니, 먹구름이 달려들기 시작한다. 대략 8km 여정의 길에서 6km를 걸은 것으로, 구글 지도를 보며 판단했다. 그때의 시각 대략 5시 정도. 마른번개가 치고 곧이어 천둥이 울리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후득후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러다 말겠지 하는 기대를 무시하고,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급기야 완전 구름으로 뒤덮인다. 거리엔 헤드라이트를 켠 차량으로 인해 그나마 불빛이 있을 뿐이었다. 순식간에돌변한 하늘에선 빗줄기를 쏟아붓기 시작한다. 아이요!(싱할라어의 '아이고!'라는 감탄사)택시를 타야 되나 망설이기를 잠깐, PickMe라는 택시 호출 앱을 작동하고 검색해 보니, '트리윌에꺼'라 불리는 세발 자동차 툭툭이는 부르는 게 값이라고, 2km 남짓한 거리에 8,000루피(한화로 32,000원 정도)를 호객하고 있었다. 너무 기가 차, 택시는 포기했다. 그 대신 어떻게든 이곳을 가로질러 최단 시간으로 빗속을 질주하면, 30분 정도면 숙소에 도착하리란 계산으로 달렸다. 그런데 방향은 그런대로 맞았지만, 이곳 스리랑카 도로를 너무 얕봤다.( 나중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다운타운을 통과하는 메인도로 3가닥이, 남북은 그런대로 직선으로 이어져 있지만, 동서 노선의 경우, 직선으로 관통하는 도로는 매우 드물고, 때로는 서서히 돌아, 다시 오던 방향으로 가게 되는 도로가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그 와중, 끔찍하게 쏟아붓는 물줄기와 본격적으로 울어대는 천둥소리와 번뜩이는 번개의 기세에 눌려, 기능을 상실한 소형 우산을 접고, 급기야빗속을 초고속으로 뛰기 시작한다.
그러기를한참,지금쯤이면, 어둠 속이라도 기억했을 랜드마크를 찾을 수 있을 텐데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겨우 어느 상가 처마밑에서 나침판을 꺼내 들고, 방향을 보니 오호라 이런 사단이!! 다시 북쪽(처음 시장 가던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구나! 지금은 누구를 탓할 때가 아니다. 구글 지도를 살펴보니 숙소는 더 멀어져 있다. 다시 방향을 바로 잡고 심기일전, 겨우겨우 숙소로 돌아왔다. 그래도, 숙소 로비에 물줄기를 주욱~뿌리며 만면에 웃음을 짓는다. '굿이브닝~'. 겨우 살아 돌아온 것이다.
후기: 피해상황 집계결과 가방 침수로 인해, 노트, 암기장, 스리랑카 돈 약간의 침수 피해를 입음. 이곳 열대지방에서는 주야장천 비가 오질 않는다. 다음날, 화창한 어제의 전쟁터를 다시 둘러보며 복기를 해보고자 아침밥을 먹고, 잠시 천주 교회당을 찾아 미사의 예를 올린 다음, 반경 500m 정도의 구글의 지도를 모사, 그 길을 따라 크고 작은 거리의 상가, 절간, 모뉴멘트, 체육시설 등을 표시하며, 특히 갈라지는 사거리나 삼거리의 랜드마크가 될 건물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표시해 봤다. 다시는 번개와 천둥과 동행하고 싶기 않기 때문, 어제는 제삿날 되지 않을까 쫌 많이 쫄았다.
펫타 마켓
펫타 마켓은, 콜롬보에서 유명한 재래식 시장 중 하나다. 주로 농산물과 온갖 잡화를 취급하는 시장으로, 야채, 과일류가 집하하는 곳이다. 붐비는 인파에 휩쓸려 행여, 도난이라는 불행과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 신발끈도 다시 여미고, 지갑, 핸드폰 모두를 가방 속에 꼭꼭 숨기고, 흥정용 몇 푼 만 주머니에 넣었다. 모두를 도둑 취급하는 것은 예가 아니지만, 현지인 틈에 낀 황색 인종은, 눈을 부라리며 먹이를 찾는 쓰리꾼들에게 쉽게 눈에 띄기 마련이다. 그래도, 오늘의 과제는시장 보기. 이건 얼마입니까? 이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너무 비싸요, 좀 깎아 줄 수 있나요.. 비싸요.. 25루피에 줄 수 있나요?.. 네네 전부 얼마입니까?..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뭐 대충 이런 시장 흥정을 거의 모든 초급 현지어 책에서 다루고 있다. 1000루피 해봐야 우리 돈으로 4000원 남짓인데 굳이 거기서 얼마를 깎겠다고, 발음도 이상한 늙은 놈이 지랄하네 소리 들을까 겁나, 달라는 대로 망고, 바나나, 토마토, 고수풀 등을 챙기고 돌아섰다. 시장 모습, 날씨, 사람들이, 묘하게도 태국 수린주의 시장과 너무 흡사해 자꾸 랑카의 싱할라어는 생각이 가물한데, 불쑥불쑥태국어가 생각나기도 한다. 사실, 어원을 거슬러 올라보면 인도어, 스리랑카어, 우루드어, 태국어등 산스크리트에 기반한 언어들은 비슷한 말이 많은 편이다. 어쨌든 이곳을 벗어나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서 맛을 봐야 하는 직성 때문에, 길만 잃지 않는다면 무사히 저녁 시간까지 갈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단은 여기서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