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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랑카 Nov 05. 2024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띄우는 편지

8화  상남자 왕의 슬픈 유적 시기리야에서



아누라다푸라 신성 도시는 ‘깨달음의 나무(tree of enlightenment)’인 보리수 주변에 건설되었다. 이 보리수의 가지는 아소카(Asoka) 왕의 딸이며 비군지의 계율을 만든 상가미타(Sanghamitta)가 기원전 3세기에 가져왔다고 한다. 아누라다푸라 신성 도시는 1,300년 간 실론(Ceylon, 지금의 스리랑카)의 정치적·종교적 수도였으나, 993년 타밀족(Tamil)의 침략을 받아 쇠퇴했다.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이 유적은 궁전, 수도원, 그리고 다른 유적들과 함께 한동안 정글 숲에 묻혀 있었으나 지금은 다시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본문에서 

 



기원전부터 천 수백 년을 이어온 옛 도읍지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탐방이 불발되면서 동시에, 3세기경 아소카왕의 영민한 영애였던 상가미타 공주가 심었다는 보리수(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보리수나무)의 예방도 물 건너갔다. 해서, 스리랑카 고대 도시 아누라다푸라 왕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인, 거칠지만 상남자 기질이 다분했던 시기리야의 카사파왕 (AD449~495) 이야기로 대신하겠다.


이야기에 앞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담불라 지역 거대한 분지에 조성된 시기리야에서, 주인공은 전투에 패하고 자살을 선택해, 역설적으로 시기리야를 지켰다.



랑카인들은 카사파왕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질문에 안내원이 답하길, 랑카인들은 매우 부정적인 답변을 낸다고 한다. 이유인즉, 그는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아이며, 수백 명의 후궁을 거느린 호색한이라는 점을 들었다.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다토세나 왕의 두 아들 중 장남이었던, 주인공 카사파 왕자는 신분상의 핸디캡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은 왕족이 아닌 평민 엄마를 둔 금수저 출신이란 점이다. 반면, 한 살 아래 왕족 엄마를 둔 슈퍼급 금수저인 차남 목갈라나(AD450~515) 왕자 있었다. 따라서 왕위 쟁탈전은 불문가지. 이에 우리의 주인공 상남자는 분연히 일어나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세력을 모아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이때가 AD 473년, 그의 나이 24살, 아빠왕은 감금되어 있다 죽임을 당하고, 동생 목갈라나 왕자는 인도로 망명길에 오른다. 사실 이것이 상남자의 비극, 첫 장면이다.


쿠데타 성공 4년 뒤, 주인공은 70여 km 떨어진 담불라 정글 속 붉은 화강암의 천연 요새를 중심으로, 왕국을 천도하기에 이른다. 이때가 서기 477년. 공사기간은 7년 정도 소요되었다 한다.(문헌을 살펴보고 쓴 글이 아닌, 순전히 동행한 시기리야 안내원의 설명에 따라 구성하였다). 우선 왕궁의 시작은 족히 20여 m 정도의 해자를 세 방향에서 두르고, 1km 남짓한 천연요새까지 중앙 메인 도로를 건설한다. 철저하게 좌우 대칭의 같은 시설물들을 배치해 안정감을 더했다. 또한 이곳에 후궁들을 위한 테니스장 규모의 목욕탕을 4개씩이나 설계하였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후궁들의 복지를 위한 단적인 표현이라고, 어떤 이는 비난으로 또 혹자는 감탄으로 평가를 달리하는 부분이다.


그 왕궁의 끝은 천연요새로 이어지는데, 요새는 200m 높이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상층부는 맨 위 사진처럼 평평하게 다듬어져 있어, 그 위에 왕이 머물 수 있는 작은 궁전과 수영장, 기타 부속 시설물 등을 배치했다. 당시로서는 올라가는 길을 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역사(役事)였음에도, 주인공의 센스는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즉, 수직에 가까운 바위면에 비를 가릴 수 있는 동굴(cave)만 있으면 장인들을 내려 보내, 석회에 벌꿀과 계란흰자를 섞어 만든 시멘트로 벽면을 다듬은 다음, 가슴을 훤히 들어낸 후궁들을 모델로 삼아 그들의 아름다움을 새겨 넣었다.  훗날 사가들이 이름 붙이길 '21명의 천상의 여인들"이란 그림이 그것이다.(국보급의 보물로 사진, 접근, 모두가 불가능하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다. 495년 천도 후 18년, 상남자 나이 46세에, 정확히 22년 전 잉태한 비극이 찾아온다. 그의 배다른 동생이, 호화로운 천상의 꿈같은 시간을 즐기고 있던 카사파왕에게, 한판 붙자고 찾아온 것이다. 전해오는 왕국의 연대기 '마하왕사'에는 상남자 카사파는 이 왕궁의 파괴를 막고자 이곳에서의 전투대신 스스로 목을 찔러 왕궁을 지켰다 한다. 다행히 동생 목갈라나왕자는, 아누라다푸라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면서, 이 시기리야 왕궁을 수행승들의 거처로 내주고, 아누라다푸라로 왕궁을 재 천도한다. 그 뒤 세월이 뒤숭숭하고 여러 곡절을 거치는 동안, 시기리야는 수행승들마저 떠나가고 정글 속에 버려졌다. 그 뒤 무심한 세월이 흐르고 흘러갔다. 1831년 영국군 장교 조나단 포브스가 왕국의 흔적을 발견할 때까지, 시기리야 왕국의 상남자 카사파왕은 정글 한가운데 사자가 되어, 끝까지 왕궁을 지켰다.



후기:수천 년이 흐른 오늘날 랑카인들이 혐오했던 사파 왕의 흔적을 찾아, 전 세계 각지에서 오직 이 왕궁만을 보기 위해 스리랑카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외국인 입장료 30달러, 필수적으로 시기리야 관광협회 가이드를 동행해야 하는 스리랑카 관광 상품 중 가장 고수익을 내는 상품으로 알려져 있다. 1957년 주은래 중국 총리가 방문했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한 많은 외국의 지도자들이 스리랑카를 방문해 상남자 카사파를 만나곤 한다. 






담불라 석굴사원의 와불


 시기리야 왕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담블라 석굴사원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담불라 황금사원(공식적 명칭)은 스리랑카 섬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곧바로 세운 불교 건축물로 무려 22세기 동안 줄곧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한세기도 겨우 사는 인간의 흔적이 거의 선사시대로 취급하는 기원전 1세기에 거대한 와불을 조성하고, 부처의 행적을 기리는 종교의 놀라운 파워 앞에, 제대로 감탄과 숙연함을 표현할 길이 없다. 석굴 진입로에서 몇 개의 수련 꽃송이를 사들고, 5개의 공개된 석굴 사원의 부처님과 이름 모를 제자들(조사하면 다 나올 텐데, 나만 모를 뿐이다) 입상 앞에 봉헌한다. 의외로 관리는 느슨하게 느껴져, 순순히 신발을 벗고 맨발 상태로 석굴을 향하기만 하면, 누구도 성가시게 제지하는 이 없다. 짐작하건대 황금사원의, 석굴 보전의 진짜 비밀은 따로 있을 수 있다. 현대식 장치를 동원해 요란 떨지 않아도 신심 지극한 신자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은 한, 이 불상들은 그 옛날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박제가 아닌 살아 있는 현재 진행형 불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아마도 이점에 유네스코는 주목해 등재의 사유를 밝힌다. 즉, '담불라는 스리랑카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이다'라고 공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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